한 뼘 판타지 052 몹시 긴 하루

영영이의 어린 시간

by eunring

아빠 아빠 너무 길어요

하루가 너무너무 길어요

무얼 해도 시간이 엉금엉금

거북이처럼 제자리걸음이에요


영영이의 어린 하소연을

눈먼이가 다정히 다독여 줍니다

우리 영영이가 간절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구나


네~

영영이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영롱 할머니를 기다려요

재미나게 또 만나기로 했는데

며칠째 휴식 중이세요

나이 들면 회복이

거북이처럼 느리대요


아빠의 하루도 몹시 긴 하루냐고

영영이가 눈을 반짝이며 묻습니다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제자리걸음이냐~는

영영이의 물음에

눈먼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희미하게 웃습니다


우리 영영이처럼 어릴 적에는

하루하루가 아주 길지

하루에 겪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선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란다


나이 들수록 하루하루가

주르륵 미끄럼이라도 타는 듯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지

나이가 들면 하루의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이 분명하지 않고

뜨문뜨문 기억나기 때문이란다


어린 날들의 시간과

어른들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듯

눈 안에 들어오는 세상도 다르지

어릴 적에 바라보는

세상 모든 것들은 크고 넓고 환하고

다채롭고 신기하고 대단했으나

나이 들어 바라는 세상은

좁고 촘촘해서 번잡하게 느껴진다

거미줄처럼 엉킨 일상에

걸려드는 건 걱정과 염려들이거든


대단해 보이던 것들도

어느 날 문득 그저 그렇게

작아지고 좁아지고 시들해지고

울적해져서 볼품없어 보이는 것도

참 이상하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것과도 같아

어릴 적 뛰놀던 세상처럼

재미나고 신기한 나라가 아니라

시들하고 자잘하고 칙칙해서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어슷비슷 거기서 거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세상이

아롱다롱 무지갯빛이었다면

나이 들어 바라보는 세상은

무채색과도 같아


그러나 영영아

엄마를 기다리는 아빠의 시간은

비록 무채색이지만

제자리걸음은 아니란다

한 걸음 한 걸음

엄마와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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