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8년 11월 10일 금요일
새벽 6시. '띵동-' 벨소리가 울리고, 곧이어 박 집사님이 현관문 열어주는 기척이 느껴진다. 약속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방문 요가 선생님이다. 2년 전 나인원한남으로 이사를 오면서 방 하나를 요가실로 꾸미고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한예종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요가와 필라테스, 카이로프랙틱까지 두루 섭렵한 실력자라고 했다. 처음에는 워낙 수강 대기자가 많아서 수업을 더 늘리기 어렵다더니 며칠 뒤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 모양이다. 내 첫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며 팬심을 고백해 주니 얼마나 기쁘던지. 그렇게 요가를 시작한 이후 만성적인 두통과 요통, 불면증이 모두 사라졌다. 시르사아사나 자세를 꼿꼿하게 해낼 때마다 내 모습에 은근히 취하는 맛도 제법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요가 수업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이다. 오늘도 90분 정도 요가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하루를 가뿐하게 시작한다.
거실 통창으로 양재천이 한눈에 보이는 주상복합 아파트 27층의 작업실. 아침마다 출근도장을 찍는다. 책상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돈 무서운 줄 모르던 철부지 시절 가난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할 때는 그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삶이 버거울 때마다 양재천의 사계절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마침내 내 힘으로 이곳에 돌아왔다는 벅찬 기쁨은 누구에게도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한참을 옛 생각에 빠져 있다가 양재천을 걸으러 나섰다. 조깅에 딱 적당한 쿠션이 깔린 길. 도심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오랜 거목들이 만들어내는 한낮의 그늘. 얼마 남지 않은 단풍잎이 봄날의 벚꽃처럼 흩날리는 늦가을의 풍경.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도 머릿속은 다음 주 여행과 그 이후 일정을 조정하느라 쉴 새가 없다. 다음 주에는 결혼기념일을 기념하여 열흘 간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잇는 크루즈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도 초호화 크루즈여행은 처음이라서 다들 한껏 들떠있다. 서울과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시우(가명)는 동아리 회장을 두 개나 맡고 있어서 입시 외에도 교내외 축제와 대회 준비로 눈코 뜰새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뭐든 도전해 보려는 적극성과 욕심이 남다른 아이였다. 그래도 기꺼이 일정을 조율하여 가족 여행에 함께 해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국제중학교에 다니는 가비(가명)는 여전히 긍정의 아이콘이다. 진로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면서도 여행이야말로 새로운 영감의 근원이라나 뭐라나. 여행은 언제든지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모습이 나를 꼭 닮았다.
정오쯤 청담동 단골 샵에 들러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았다. 지적이면서도 따뜻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세련된 모습. 거울 속에 낯설지만 반가운 내가 있다. 열 살은 젊어진 듯 화사하게 꾸미고 교보문고 광화문점으로 향했다. 벌써 세 번째 출판기념회이다. 이번에는 작가사인회를 겸하기로 했기 때문일까. 산뜻한 출발과는 달리 행사장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느려졌다. 혹시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어쩌나 싶어 심장이 두근대고 손발이 자꾸만 엇박자를 냈다. 다행히도 주최 측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자들이 와주었고, 혼잡한 와중에도 사고 없이 행사를 잘 마무리했다. 특히 젊은 독자들의 눈길을 끈 것은 BTS의 리더 RM(김남준)이 보낸 화환이었다. 도대체 RM과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눈길이 여기저기서 느껴졌지만 비밀에 부쳐두기로 했다. 쉰 살을 목전에 둔 작가가 단지 RM의 이웃이 되어보려는 속셈으로 나인원한남에 이사까지 갔다는 얘기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 덕분에 RM을 비롯한 BTS 멤버들과 가까이 교류하는 성덕이 되었다고, 대나무숲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이 책의 표지는 JK(전정국)가 깜짝 생일선물로 그려준 그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얼마나 난리가 날지 상상해 보며 혼자 웃음을 삼켰다.
외부 일정을 마치고 급히 집으로 돌아와 보니 박 집사님의 진두지휘 아래 케이터링 업체의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뒤풀이니 파티니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조촐한 저녁식사 자리였다. 브런치 글쓰기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이은경 선생님과 동기 분들, 출판계와 문화예술계의 몇몇 인사들을 초대해 집으로 모셨다. 이웃사촌 RM도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었다. 초보작가에게는 과분한 칭찬, 응원과 격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게 다 무슨 복인가.' 싶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감사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써야지. 복을 짓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뿐.
따뜻한 욕조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곤한 기운이 퍼진다. 당장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을 살살 달래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차기작으로 계약해 둔 여행 에세이 작업을 구상하기 위해서이다. 지난 6월에 부모님과 함께 다녀온 캐나다 서부 여행을 떠올리자 타자 치는 손에 절로 속도가 붙는다. 페어몬트 샤토 레이크 루이스 호텔 스위트룸에서 바라본 레이크 루이스는 가슴 저리게 감동적이었다. 캐나다 횡단열차를 타고 종횡무진하던 대학 시절 부러운 눈길로 바라만 보았던 호텔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기까지 근 30년이 걸렸다.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불과 5년 전만 해도 현생에서는 영영 이루지 못할 것 같았던 일들을, 이제는 글쟁이가 되어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 환갑 즈음에는 여행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커다란 열기구를 타고 순풍을 맞으며 온 세계를 날아다니는 상상에 잠 못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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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배경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