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서사극, 언제 이렇게 확산되었나

김태형 연출 중심으로

by 정은샘

고 3때 연영과 입시를 준비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뮤지컬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당시 내가 다녔던 대형학원에서는 연기과보다 잘해야만 붙을 수 있다며 연기과만 지원하도록 했다. 같이 입시를 준비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도 뮤지컬배우를 꿈꿨다. 보컬도, 무용도, 연기도 누구보다 뛰어난 친구였다. 그런데 뮤지컬과에 지원하지 않는다 고 했다. 뮤지컬은 여성이 설 작품이 적다는 것이 이유였다. 학교에 들어가면 공연을 하게 되데 자신이 설 공연이 없다는 것이었다.


공감했다. 당시에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으론 어쩌다 한번씩 재공연되는 위키드, 서편제가 전부였으니까. 그 외작품에는 여성 주인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배역과 조연들은 주로 남성인 경우가 흔했다.


관례를 떠나 뮤지컬 시장의 특성상 어쩔 수 없었다. 여성들이 주 관람객을 차지했고 여성들이 찾는 공연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배우가 나오는 공연이었으니까. 여성이 많이 나오는 극은 수입을 낼 수 없었다. 티켓 수입으로 제작비를 충당하는 우리나라 뮤지컬 제작 구조상 남성 서사와 남성 위주의 배역은 필수였다. 그런데 미투운동으로 시작된 양성평등 운동의 영향은 뮤지컬 무대에 서는 여성 배우들의 입지까지 확산되었다.


프로무대에 서는 경험은 배우들에게 큰 성장의 기회다. 하지만 여성 배우들은 남성 배우들에 비해 그 기회의 절대적 수가 부족했다. 기회가 있어도 입체적 역할이 아닌 서사없이 남성 역할의 입체성에 도움을 주기 위한 도구적 역할들이 대다수였다. 창녀 아니면 성녀, 라는 말이 나올만큼 여성의 캐릭터는 한정적이었고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주 관람객인 여성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성을 수동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반대하고 능동적인 캐릭터 상을 요구했다.


김태형 연출의 연극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젠더 프리 캐스팅은 의식이 확산되기 전 선두에 섰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김태형 연출은 인간이 하는 이야기를 굳이 남성만 해야한다는 법이 있냐고 말한다.


김태형 연출의 뮤지컬 '오늘 처음 만든 뮤지컬' 또한 젠더프리 캐스팅이다. 특히 '오늘 처음 만든 뮤지컬'은 이머시브 공연으로, 관객의 참여가 극의 흐름을 만드는데 여성배우들로만 이루어졌을 때 관객의 집중도가 다르다고 한다. 이 공연을 성공시기키고 말겠다는 의지가 타오른다고 표현했다. 티켓 구매율도 다른 캐스팅 조합보다 높다고 한다.


김태형 연출의 또 다른 극 뮤지컬 '마리퀴리' 는 능동적이고 입체적인 여성상을 대표하는 여성서사극 뮤지컬이다.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을 받은 '마리퀴리'를 비롯해 작품상을 받는 작품들이 여성서사극 뮤지컬으로 대폭 증가했다. '레드북',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리지' 등이 있다. 최근 초연, 재연 매진을 기록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전 배역이 여성이다. 여성을 넘어 인간으로서 폭력의 순환과 자유의 억압을 이야기하는 극이다. 여성 배우에 대한 수요를 입증한 작품이었다.


젠더 벤딩 캐스팅, 젠더 크로스 캐스팅, 여성 서사극, 여성 배우가 많이 나오는 극의 제작으로 여성배우들의 입지가 보다 넓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인종마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크리스틴 역에 흑인을 캐스팅했다. 갈수록 신체가 한정짓는 역할의 한계성이 사라지고 있다.


입시를 했던 4년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물론 비율을 비교한다면 남성서사극이 많지만 여성서사극이 일순간 트렌드가 아닌 작품성으로 지속될 입지를 견고히 다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들이 존재한다. 어떤 작품은 능동적 여성상이 트렌드라는 이유로 작품에 우겨넣기하며 플롯이 부자연스럽다. 이 부분은 개선해나가야할 문제가 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와 내 친구가 느꼈던 뮤지컬에서 여성배우들이 맡을 역할이 없다는 세상이 변화했다.


세상은 원체 불합리성의 총합이고 기대는 부질없는 희망이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말대로 불합리적인 세상을 직면하고 세상과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강한 의지를 가질 때 인간은 인간 다울 수 있었다. 불합리적인 세상을 져버리기엔 세상은 인간의 의지로 변화를 보여왔다. 일순간의 희망은 없더라도 지속된 희망은 존재했다. 우리는 불합리적인 세상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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