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쁨

마음과 같지 않은 순례길

by 은섬


순례 3일 20㎞
출발 : 수비리 Zubiri
도착 : 팜플로나 Pamplona

수비리 알베르게에서 준비해 준 아침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본다. 밤 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옷을 갈아입은 산등성이에 커피 향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산 아래는 계속 비다. 오스피탈레로는 빗속에 길을 떠나는 우리들을 마당까지 나와 배웅해 주었다. Rabia 다리를 지나자마자 바로 만난 이 알베르게가 순례 중 가장 시설이 좋았다.

마그네슘 공장을 지나 강을 따라 걷는다. 중간에 채석장을 지난 지점부터 오른 다리를 질질 끌기 시작했다. Burlada를 지나 대도시 속으로 들어간다. 순례 후 첫 도시다. 각 국의 언어로 '여성'을 써 놓은 큰 벽이 지친 순례자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성문을 통과한 제임스 아저씨와 나는 성벽을 끼고 돌아 팜플로나에 들어섰다. 대도시인 팜플로나만큼 큰 규모의 알베르게는 강렬한 칼라로 꾸며진 신식이었는데 며칠사이에 대도시의 그것들이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샤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는 동안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소몰이 축제로 유명한 거리를 걷다가 핀초스와 여러 가지를 맛보았다. 늦은 시각 알베르게에 돌아왔는데 그때까지 제프는 알베르게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그를 보지 못했다. 후에 다렌에게 듣기로 제프는 물집 때문에 순례를 포기하고 수비리에서 영국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순례 4일 24㎞
출발 : 팜플로나 Pamplona
도착 : 푸엔떼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팜플로나를 나서며 나바라 대학 캠퍼스에서 첫 대학 세요를 받았다. 이른 아침 출발 했음에도 점심 무렵에야 그 큰 도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용서의 언덕까지는 주택단지와 오르막이 계속된다. 눈과 비가 섞여 내리다 우박이 떨어졌다. 변화무쌍한 날씨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다. 갑자기 얼어붙은 오르막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스틱으로 얼음을 깨 가며 걸어야 할 정도다. 바둥바둥 오르막을 오르다가 얼음 속에 묻혀 있는 작은 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다 큰 것이 그만큼 작은지 아직 새끼인지, 독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면서도 무서움보다 살려야겠단 생각이 먼저 든다. 나 하나 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왜 내 눈에 보였는지... 얼음 속에서 뱀을 꺼내 햇살이 비치는 풀밭 위에 올려놓았다. 시간이 흐르자 뱀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살아있구나. 어서 가렴. 인사를 건네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800m 용서의 언덕 정상에서는 나바라 까미노 친구들 협회에서 세운 철제 조각품을 만난다. 풍력 발전기가 돌고 있는 그곳은 스틱으로 지탱했음에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매우 강해서 급경사를 내려가는 것이 쉽지 않다. 이 길을 왜 걷는지에 대한 이유들이 모조리 강풍에 날아가고 멘털이 탈탈 털리다가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겨우 도착했다. 크레덴시알에 세요를 찍어주던 수사님께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부드러운 음성으로 위로를 건네신다 "너 배고프지? 뭔가를 좀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지금 네 얼굴이 하나도 기쁘지 않아. 음... 대부분 배가 고프면 그렇단다. 너는 지금 단지 허기에 컨디션이 나쁜 것뿐이니 걱정 말고 오늘 이곳에서 푹 쉬렴. 넌 이 길을 잘 걷고 있어. 자부심을 가져."

길을 걸으며 내가 내 모습을,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내 표정이 기쁘지 않았구나. 내 마음에 기쁨이 없었구나.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들이면서... 하아, 나는 어느 지점에서 기쁨을 잃어버린 걸까? 어딘가 깨어진 틈으로 조금씩 빠져나가 버린 걸 내내 몰랐던 걸까? 아니면 기쁨은 애초부터 없었던 걸까?



순례 5일 21.8㎞
출발 : 푸엔떼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도착 : 에스떼야 Estella

처음으로 비가 오지 않는 날이다. 급경사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로마 시절의 도로와 중세 다리를 지났다. 카트린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바와 식당을 찾을 수 없는 길에서 자판기 커피와 비스킷으로 함께 점심을 때웠다. 도착한 알베르게는 침대가 놓인 방이 계단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약국에 들러 발에 붙일 드레싱 밴드를 찾자 약사가 굳이 내 발을 보자고 한다. 너덜너덜해진 발을 슬쩍 보여주고 후다닥 신발을 신으니 약사가 괜찮다고 웃으며 나를 의자에 앉힌다. 그녀가 얼굴 가까이 내 발을 두고 구석구석 너무나 열심히 살펴볼수록 나는 세상 민망한 얼굴이 되어 반창고를 샀다. 저녁 대신 토마토와 요거트를 사들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다렌이 작별 인사를 건넨다. 이 날 이후로 다렌은 하루에 60Km씩 걸었다. 한반도 상황에 대해 여러 대화를 나눴던 제임스 아저씨는 함께 길을 걷자 내게 제안했지만 오른 다리를 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는 그에게 짐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제임스와도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망가진 대근육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이 상태로 완주할 수 있을까? 중간에 기차나 버스로 점프를 해서라도 완주를 할까? 구간을 나누어 갈 수 있는 만큼만 걷고, 완주는 다음 순례로 미뤄야 할까?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고 완주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왜 낳았나
왜 키웠나
어미의 깊은
원망과 회한은

어미로부터
부정당한 존재가
견뎌야 하는
예리한 자상이다

버려질까 불안한
어린 눈동자에
슬픈 자조가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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