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예의!

각자의 순례에도 필요한 배려

by 은섬


순례 6일 21.3㎞
출발 : 에스떼야 Estella
도착 : 로스 아르꼬스 Los Arcos

새벽부터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첫 바(bar)에서 크루아상과 카페 콘 레체로 아침을 먹고 에스떼야를 벗어나 아예기를 통과한다. 아예기는 순례를 시작한 생장에서부터 100Km가 조금 넘는 지점이라 첫 100Km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의미로 아예기 시장 명의의 '아예기나 증서'를 공립 알베르게인 성 치프리아노 알베르게(Albergue Municipal San Cipriano - AYEGUI KM 100)에서 발행해 준다. 아네트와 함께 아예기나 증서를 받아볼까? 했지만 몰아치는 거센 비바람에 의욕을 잃고 이라체 와인의 샘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바람 앞에서는 종이 증서가 주는 명예보다 와인이 주는 에너지가 더 절박한 법이다.

와인의 샘 - 왼쪽은 와인 VINO, 오른쪽은 물 AGUA

이라체 수도원은 나바라의 오래된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10세기 이전부터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을 운영하면서 병자를 돌보고 음식과 물, 소금, 포도주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순례자들이 순례를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수도원에서 만들던 포도주는 현재 보데가스 이라체 와이너리로 변모했지만 옛 전통에 따라 지금도 365일 날마다 아침 8시 100리터 용량의 탱크에 와인을 채워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매일 무상으로 제공되지만 무한정은 아니어서 당일 탱크에 채워진 100리터가 소진되면 뒤늦게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이 와인 맛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모두들 뒤에 올 순례자들을 위해 가볍게 목을 축이는 정도로만 즐기고 물병 가득 와인을 채워가지 않는다. 빛나는 배려가 마르지 않고 샘솟는 와인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순례 7일 27.9㎞
출발 : 로스 아르꼬스 Los Arcos
도착 : 로그로뇨 Logrono

급경사인 오르막과 내리막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멍든 발톱에 통증이 심하다. 결국 가위로 양말을 잘라 구멍을 내자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구멍으로 빼꼼 드러난 발가락이 아주 신났다. '발가락이 신났어!'라고 아네트에게 말했더니 '그래? 그럼 축하해야지!'라며 좋아하는 초코 빵을 3개나 사 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비아나 구시가지에 막 들어섰을 때 에스떼야에서 헤어졌던 제임스를 우연히 만났다. 제임스와 카트린 등 대부분의 일행들은 비아나에서 묵고, 아네트와 둘이서 로그로뇨로 향했다. 강을 건너 로그로뇨에 들어선다. 두 번째로 우리를 맞이하는 대도시다. UNED 대학 옆 교구 알베르게에 여정을 풀었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도네이션으로 제공하는 식사를 했는데 밥 먹기 전 다 같이 울뜨레야 노래를 불렀다. 울뜨레야는 '앞으로 나아가다'라는 뜻이다. 식사 후에는 오스피탈레로의 주재로 기도와 축복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교구나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고유의 카리스마에 따라 특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공용어가 아닌 각자의 언어로 축복의 인사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통역 없이도 우리 모두는 서로의 마음을 다 알아듣고 화답할 수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 모두가 잠든 11시 즈음 불 꺼진 알베르게에 다시 불이 켜지고 다급히 오스피탈레로가 들어와 순례자들을 깨웠다. 한국인 자전거 순례자 그룹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30분 후 도착할 예정인데 늦은 밤 그들이 묵어도 좋을지 우리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룹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탄식이 터졌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순례자이므로 기꺼이 환영하기로 했다.



순례 8일 30.78㎞
출발 : 로그로뇨 Logrono
도착 : 나헤라 Najera

로그로뇨의 알베르게는 아침식사도 도네이션으로 제공한다. 아침, 식탁 앞에서 우리는 몹시도 당황했고 나는 화가 치밀다 못해 슬펐다. 알베르게 식사를 거절한 자전거 그룹이 라면을 끓여 먹은 후 치우지도 않고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들이 사용한 부엌, 욕실과 거실, 로비... 모든 곳이 쓰레기장이다. 소란에 밤 잠을 설치게 하고 이른 새벽 떠나면서까지 온갖 민폐를 다 끼친 이들은 정말 순례자일까? 그들의 길이 순례인 걸까? 자전거 훈련이 필요했다면 다른 훌륭한 코스가 많을 텐데 여기까지 온 이유는 뭘까? 우리는 오스피탈레로에게 엉망이 된 알베르게 청소를 돕겠다고 제안했지만 오스피탈레로는 알베르게 관리는 본인의 일이니 마음 쓰지 말고 순례를 계속하라 격려한다. 속이 시끄러운 나는 발걸음이 무겁다.

'라 그랑지 저수지 공원'에서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가라앉은 기분을 떨쳐버리려는데 붉은 청설모가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어머? 지금 나한테 그 작은 손을 주는 거야? 그 손 주면 이제부터 확 내 거 해버린다~! 아랑곳없이 청설모가 내 손가락을 꼭 쥔다. 손가락에 희미한 압력이 느껴졌다. 청설모가 전하는 뜻밖의 위로다.

로그로뇨 시가지를 벗어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고, 나헤라에 들어선 후에도 알베르게를 찾기까지 오래 걸어야 했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은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바람이 심한 데다 시립 알베르게를 찾는 길이 생각보다 복잡했다. 도시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꽉 들어차있어 길을 찾는 시선이 어지럽다. 소음과 화려함으로 길을 잃게 만드는 도시는 이방인들을 더욱 낯선 존재가 되게 한다.

순례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30Km 이상을 걸은 날이다. 알베르게에서 마태오와 재회했는데 그가 저녁을 만들어 준다. 한국인의 매운맛을 잘 안다며 나를 위해 다리 건너 마켓까지 나가서 매콤하고 짭짤한 초리소를 사 왔다. 소소한 배려와 응원... 순례길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커다란 무엇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작은 마음들이다.



순례 9일 27.5㎞
출발 : 나헤라 Najera
도착 : 그라뇽 Granon

시루에냐까지 계속된 오르막길에 힘이 빠질 무렵 골프클럽 안에 있는 바에서 카페 콘 레체, 또르띠야,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는데 버섯이 들어있는 이 집의 또르띠야가 순례길에서 먹은 것 중 가장 촉촉했다. 접시를 반납할 때 보니까 우리가 먹은 또르띠야 조각의 크기와 진열대에 있는 또르띠야 크기가 다르다. 한껏 크게 썰어 순례자에게 내어놓은 것이다. 순례길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베푸는 친절과 환대는 과연 어디까지인 걸까? 가늠할 수 없는 무게와 깊이에 감사가 피어난다.

닭의 전설이 있는 산토 도밍고 데 깔사다를 지나 그라뇽에서 머문 스마일 알베르게 (LA CASA DE LAS SONRISAS)는 묵었던 알베르게 중 가장 추웠다. 도네이션으로 저녁과 아침을 제공하는데 벽난로가 있는 식당을 뺀 모든 곳에 난방 시설이 전혀 없다. 온수도 나오지 않아 찬물 샤워를 하는데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난방이 안 되는 곳이 더러 있지만 온수까지 나오지 않는 곳은 처음이다. 겨울이 아닌 여름이었다면 이름처럼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을 텐데...



순례 10일 28.5㎞
출발 : 그라뇽 Granon
도착 : 비야프랑까 몬떼스 데 오까 Villafranca Montes de Oca

알베르게에서 준비해 준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는데 아네트의 배낭이 자꾸만 왼쪽으로 기울어진다. 순례를 시작한 지 열흘... 아네트의 몸에도 무리가 오나 보다.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었던 다른 순례자도 발과 다리 통증으로 출발하지 못했다. 지난밤 추위에 덜덜 떠느라 잠을 뒤척인 탓에 오늘은 비야프랑까 몬떼스 데 오까 초입에 있는 호스텔(Hostal El pajaro)을 잡았다. 알베르게가 아닌 호스텔 숙박은 처음이다. 난방 빵빵한 호스텔에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그니 피로가 싹 가신다. 호스텔에서도 순례자들의 크레덴시알을 확인하고 세요를 찍어준다. 호스텔이 빠에야 맛집이었을까? 따듯한 목욕에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그곳에서의 빠에야가 가장 맛있었다.



처세술
자기 계발에
젬병인 나는

미련하게
그런 줄 알면서
원하지도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하루하루
허덕이면서도

눈은 저 먼 곳
다른 세상을
신기루인 듯 쫓는다

지겹게 살아내면서
그렇게 살아지면서
무얼 바라는지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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