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다들 택시를 탔다고?

융통성 없는 외골수 순례자도 죽으란 법은 없어

by 은섬


순례를 시작하기 앞서 생장 사무소에서 조가비를 받고 55번지 알베르게를 배정받았다. 찬 새벽 루르드에서 쏟아지던 눈물을 뒤로하고 도착한 생장은 비 내리는 겨울이었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적막했다. 사실 나는 잿빛 하늘을 좋아한다. 그리고 검은 구름과 바람이 주는 우울함을 사랑한다. 그래서 쓸쓸한 생장이 마음에 들었다.

조그만 난로가 켜 있는 사무소에서 다렌과 제프가 크레덴시알을 만드는 동안 안내문(고도표, 일정표, 숙소리스트)을 받았다. 그곳 봉사자가 주간 날씨를 확인하는데 내내 눈과 비 돌풍이다. 피레네를 넘는 나폴레옹 길이 폭설로 폐쇄되어 발카를로스 길로 가야 한단다. 다렌과 제프가 자신들의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걱정 말라는 제스처를 내게 보낸다. 귀여운 친구들이다.



순례 1일 27㎞
출발 : 생장피에드포르 St Jean Pied de Port
도착 :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

밤 새 내린 비가 아침에도 계속이다. 폭우 속에 체감되는 배낭의 무게는 말 그대로 물에 젖은 솜과 같다. 점심 이후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됐는데 코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와 비바람에 어떠한 표식이나 표지도 찾을 수가 없다. 앞질러 간 몇몇을 제외하더라도 내 뒤에 오는 다른 일행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그들을 1시간 정도 길 위에서 기다렸지만 허탕이다. 다들 어디로 간 걸까? 계속된 비로 지도는 찢어져 날아갔고 가로등도 없는 산속에서 완전히 해가 떨어졌다. 산속에서 밤을 새야 하나? 첫날부터 나는 조난당한 걸까? 체온은 떨어지고 체력도 바닥난 순간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죽으란 법은 없구나, 도움을 청하려 불빛만 보고 무작정 들어간 그곳이 세상에나 바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다. 늦은 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완벽하게 젖은 내 모습에 모두들 놀라 배낭을 받아 들고 옷과 신발을 벗겨주며 왜 택시를 타지 않았느냐 내게 묻는다. 뭐? 택시? 너희는 다 택시 타고 여기까지 온 거야? 폭우에도 걷는 것만 생각했지 꿈에도 택시는 생각지 못한 나는 뒤통수를 번개에 맞은 것 같았다.



순례 2일 21.8㎞
출발 :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
도착 : 수비리 Zubiri

밤늦게 도착한 탓에 어제 못한 알베르게 접수를 하고 숙박료를 지불했다. 그 밤에 빗 속을 걸어 도착했다고 하니 믿지 않는다. 나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응수하자 그제야 세요를 찍어준다. 알베르게를 나서면서 무게가 나가는 침낭과 헤어드라이어, 여분의 옷과 양말, 책을 기부했다. 당장 얼어 죽더라도 한 발 내딛기도 어려운 배낭을 짊어지고 걸을 수 없었기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다가 헤밍웨이 마을을 막 지난 점심때부터 본격적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제 일이 신경 쓰였는지 다렌이 바에서 창 밖을 내다보다가 내가 보이자 밖으로 나와 손을 크게 흔든다. 잠시 후 세르지오가 지나가길래 다렌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내가 밖으로 나가 그를 마중했다. 세르지오는 제프를, 제프는 아네트를 우리는 순서대로 줄줄이 서로를 향한 마중을 이어갔다. 비에 젖은 옷을 말릴 수 있게 장작이 타는 벽난로 자리를 내주는 마음들이었다.


수비리까지 길은 내리막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발에 물집이 잡혀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아네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통증에 점점 뒤처졌다. 오늘도 나는 일행 중 가장 늦게 알베르게에 도착했고 늦은 만큼 꼭대기 3층 방을 배정받았다. 종일 이어진 내리막에 허벅지 대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 데다 물집 통증까지 더해져 잘 걷지 못하자 오스피탈레로가 배낭을 3층까지 들어다 준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자전거 순례자 3명이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한국인 아버지와 초등학생 딸들이다. 오늘도 나에게 죽으란 법은 없다. 오스피탈레로가 내 발의 물집을 걱정하자 아저씨가 대한민국 군필자의 위엄으로 바늘에 실을 꿰 물집을 관통시키고 더 이상 물이 차오르지 않게 실을 길게 남겨 두는 조치까지 해주셨다.

비가 계속 내린다.



달라질 건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떠올라 눈물이 쏟아졌을 뿐이다
어둑하고 희미한 여명의 새벽
그 새벽만큼이나 어슴푸레한 나의 아버지는
미어터지는 눈물이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인지 이제는 중하지 않다
그래서였다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음이
회복될 수 없는 지난 일들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

체념 앞에서 웃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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