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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Jul 09. 2022

그림, 사랑에 빠지다

두근두근 시작되는 연인들_달스고르, 밀레이


어느 날 불현듯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와 나의 모든 감각과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 사랑을 시작하는 이의 마음을 달스고르는 매우 섬세하게 그려냈다.


문득 보고 싶은 마음에 그의 이름을 유리창에 써보고, 햇살 눈부신 날 벅찬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쓰고, 글에 실려 보낸 수줍은 마음을 읽었을 상대방의 답장을 손꼽아 기다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우편함을 확인하다 드디어 답장을 손에 쥐게 되면, 한 글자 한 글자 그를 생각하며 꼼꼼히 읽는 마음... 사랑에 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감정이니까. 사랑에 두근거리는 옛 마음을 소환해 본다.


사랑이 싹트던 그때
당신, 그리고 나...

나는 그날의 당신을 기억합니다.
당신은 그때의 저를 기억하십니까?



소녀가 창가에 앉아 실을 잣고 감다가, 부옇게 김 서린 유리창에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써 본다. 손가락이 지나는 길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지고 그리움과 같은 물방울이 맺혀 주르륵 흐르고 떨어진다. 몇 번을 쓰고, 또 남이 볼까 지운 흔적들이 창 여기저기에 있다. 사랑하는 마음은 이토록 숨길 수가 없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 속 하트가 그녀의 마음 같아 귀엽기만 하다.


Christen Dalsgaard_A Young Girl in Jutland Writing her Beloved's Name on a Misty Window (1852)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적는 연서, 평범하지만 그 단어들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이른 아침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반듯하게 침대 정리를 하고서 펜촉에 검정 잉크를 찍어가며 깨알 같이 이야기를 적는 소녀의 눈빛과 입가 미소가 싱그럽다. 소녀는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자신의 일상을 적고 있을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궁금한 점을 묻고 있을까? 만날 날을 고대하며,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쓰고 있을까?


Christen Dalsgaard_A young girl writing a letter (1871)


기다리는 마음에 뜨개질을 하다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결국 문을 열고 나가본다. 수줍게 마음을 적어 보낸 편지에 그는 무어라 답했을까? 그의 마음이 궁금해 죽겠다. 편지가 배달되는 시간은 왜 이리 더딘가? 뜨개질을 하며 그의 소식을 기다리는 소녀와 문 위 작은 창에 줄을 치는 거미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Christen Dalsgaard_Surely he will come (1879)


그의 편지 이외 다른 편지는 소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의 편지를 찾느라 다른 우편물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져 흩어졌다. 그의 편지는 언제 도착하는 것일까? 그녀의 표정에 간절한 기다림이 묻어난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편지를 손에 쥐었다. 그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어! 그녀의 모습이 당당하다. 편지 한 통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마음이 그녀의 얼굴에 다 드러나 있다.


Christen Dalsgaard_But is there no letter for me? (1884) / Girl Posting a Secret Letter (1880)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와 방문을 닫고 편지를 뜯어본다. 한 글자라도 놓칠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읽고 또 읽는다. 그는 편지에 어떤 이야기를 적어 보냈을까? 소녀는 가슴 뛰는 사연이 담겨있는 편지를, 열쇠로 여닫는 장식장 서랍 속에 꽁꽁 숨겨놓고 아무도 없을 때마다 꺼내 읽을 것이다. 편지를 그곳에 보관하는 것은 낮잠 자는 개와 소녀, 둘만의 비밀이다. 시작되는 연인들의 풋풋한 설렘을 응원해본다.


Christen Dalsgaard_A young girl from Salling reading (1851)


사랑에 빠진 눈빛, 숨 막히는 애절함과 벅참에 나도 모르게 심쿵한 그림이 있다. '오필리아', '눈먼 소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이다. 밀레이는 스토리를 흡인력 있게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유명하다. 아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여인이 얼마나 오랜 시간 기다려 왔는지가 훅 느껴져서 어떤 상황인지 너무 궁금했다. 나는 제목을 보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Yes'


남자의 등 뒤로 표식이 달린 커다란 짐가방이 놓여 있고, 두꺼운 외투며 모자가 영락없는 여행자의 차림이다. 남자는 이 여인을 만나러 먼 곳에서 왔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여인의 손을 잡고 자신의 결심을 말한다. 오랫동안 남자의 고백을 기다려온 여인은, 손을 잡은 남자의 손등에 자신의 다른 한 손을 포개 얹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심으로 말한다. "Yes" 그녀의 대답은, 남자가 고백하기 오래전 이미 정한 마음이라고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다.


John Everett Millais_Yes (1877)


사실 이 작품은 밀레이 자신의 이야기다. 그림 속 여성은 '피'라는 이름의 유부녀다. 그녀의 남편은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으로 밀레이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러스킨과 에피는 혼인생활 6년 동안 부부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에피는 혼인 무효 소송을 고,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 친정집에 머물렀다. 마침내 그녀는 혼인 무효 판결을 받고, 밀레이와 에피 두 사람은 결혼을 한다. 그림에서 밀레이는 에피의 손을 꼭 잡고 "나와 결혼해 주겠소? 세상의 비난을 감내할 수 있겠소?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이 험난한 길을 정녕 나와 함께 걷겠소?"라고 묻는 것 같다.



※  [달스고르] 그림 출처 : Amazing Classic Paintings

※  [밀레이] 그림 출처 : Belle Ep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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