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가난한 노동자

그럼에도 불구한 나의 여행법

by 은섬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턴은 1933년 작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지상낙원을 '샹그릴라'로 묘사하였는데 샹그릴라는 '마음의 해와 달'이라는 뜻의 티베트어이다. 사계절이 모두 꽃피는 봄. 윈난성 리쟝 고성은 바로 그 샹그릴라로 불린다. 중국 정부의 마케팅에 불과하지만 소설 속 가상도시의 이름을 땄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이번 여정은 샹그릴라다.


직장에 매어있는 회사원으로서 내가 여행을 다니는 방법은 일 년에 한 번 휴가를 내서 떠나는 테마여행이다. 짧게는 닷새 길어야 열흘 정도 휴가라 보통 한 두 곳을 거점으로 삼아 다니는데 도시, 시골, 산, 섬과 같이 장소를 선택하거나 하이킹, 음악 페스티벌, 미술관 박물관 투어와 같은 이벤트를 중심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비용은 아시아 지역인 경우 한 달에 10만 원씩, 유럽인 경우 20만 원씩 월급날 무조건 적립해 1년을 꼬박 모은다. 돈이 정말 없던 시절에는 궁상맞은 모든 것들을 했는데, 서너 정류량 정도는 걸어 다니면서 버스비를 아끼거나, 한여름 무더울 때는 물이랑 커피를 얼려 가지고 다녔다. 뭐 이렇게까지 하면서 여행 다니냐는 말이 당연하지만, 당시 나로서는 공식적으로 나쁜 딸이 되지 않으면서도 엄마에게서 최대한 멀리, 연락 안 되는 곳으로 도망쳐 잠시나마 숨 쉴 수 있는 방법이 해외여행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 여행사 그룹투어 패키지로 떠나본 적은 없고, (여행사 패키지는 검증된 루트이므로 개인 취향에 따라 그룹투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현지에서 반나절 또는 하루 로컬투어는 가끔 신청한다. 혼자 준비하는 여행은 직접 루트를 짜고 계획을 세우는 재미가 상당하다. 상상하며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는 성향은 타고난 병인 듯하다. 동기부여만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어서 거짓말 같지만 대학시절 새터(신입생 OT) 준비에 학생회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채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사흘이 지난 적도 있었다. 써놓고 보니 정신상태가... 아무튼... 여행할 곳을 정해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고, 필요에 따라 그 나라의 역사 지리 등을 공부하고, 인터넷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며 하나씩 알아가는 기쁨이 크다. 그래서 나의 여행은 단순히 여행지에서 경험과 감상뿐만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기까지 준비한 시간과 과정을 포함한 여정이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


현지 숙소는 게스트하우스를 주로 이용한다. 호텔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게스트하우스가 가격도 저렴하고 편하다.(단, 한인민박이나 도미토리는 개인적인 성향으로 비선호. 여성 혼자 여행에서 에어비앤비는 안전관계로 비추천.) 식당은 로컬식당을 좋아한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없어서 나가 있는 동안 한식은 찾지 않고, 혼밥도 잘한다. 혼밥 어디까지 해봤니? 챌린지 비슷한 질문을 어디선가 보았는데... 나는 혼밥을 뷔페까지 해봤다. 옷도 입은 옷과 입을 옷, 딱 그거면 되기 때문에 짐도 늘 배낭 하나면 된다.


리쟝은 베이징을 거쳐 중국 국내선으로 쿤밍으로 간 다음 침대버스로 가는 것으로 루트를 짰다. 쿤밍에서 1.5일 여유가 있는데 숙소 로비에 붙어있는 1일 투어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외국인 대상은 아니고 현지인 대상이다. 하루 코스인데 시간도 적절하고 괜찮을 것 같아 신청했다.(프런트에 문의했는데 괜찮다며 접수해줬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출발시간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내가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인 척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말을 안 하는 것이다. 순조로운 출발이다. 볼거리도 많다. 중국은 땅이 너무 넓어서 이동 시간이 긴데 이런 경우에는 로컬투어가 효과적이다. 절에도 가고, 석림도 가고, 동굴, 시장, 민속촌, 발마사지까지 하루가 알차다. 점심 저녁도 준다.


중국인인 척 잘 다니다가 점심때 식당에서 음식 주문하면서 외국인인 게 들통났다. 가이드가 깜짝 놀라서 눈이 커졌다. 투어팀 일행들도 마찬가지고. 그때부터 미안하고도 고마운 그들의 배려가 시작되었다. 가이드는 어쩌다 투어에 낀 외국인을 행여나 잃어버릴까 봐 어딜 가든지 나를 그녀 옆에 있게 했다. 다른 사람들도 늘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눈여겨 확인하고 챙겼다. 중국말은 인사와 예 아니요 밖에 몰라서 그들과 글자로 소통하였고 그런 방식도 꽤나 괜찮았다. 나는 간자체를 몰라서 과연 통할까 싶었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내 옆에서 열심히 필담을 나눠주셨다. 가지고 있던 전자수첩이 큰 몫을 했다.(당시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로 전자수첩이라는 게 있었어요~) 이 나이에 결혼은 안 하고 여행 다닌다고 할아버지가 하늘이 무너져라 한탄을 하셨다. 꼬맹이는 내가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신기했는지 부모 손을 놓고 내 손을 잡고 다녔다.(나를 잘 따르는 것을 보고 젊은 부부가 은근 애를 나에게 맡겼다.) 모두들 정겹고 고맙다.


일일 투어를 마치고 밤이 되어 리쟝까지 가는 침대버스를 탔다. 침대버스는 말 그대로 앉는 좌석이 없고 2층 침대가 쭉 배치된 버스다. 침대버스는 처음이다. 내 자리는 창가인데 통로 자리보다 독립적이어서 좋다. 밀려오는 피로에 까무륵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은하수가 눈앞에 펼쳐져있다. 꿈결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됐다. 은하수를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도 딱 보는 순간 은하수인걸 알았다. 선물 같이 눈앞에 나타난 은하수를 밤새 바라보았다.


리쟝 고성은 오래된 기와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어디든 잔잔한 물길이 나있어 심적으로 사람을 차분하게 한다. 근데 문제는 관광객이 너무 많다는 것. 유명한 관광지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많아도 너무 많은 사람에 피곤해진다. 산책 겸 한 바퀴 돌며 동네를 파악하는데 뒷동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을 발견했다. 나지막한 언덕이라 부담 없이 올라가 본다. 고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잘 왔네...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 있으니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돌담 위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해본다. 세상과 조금 떨어져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나에게 살아갈 힘이 된다. 이번 여행의 나의 화두는 '왜 사는가' 다.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한참을 앉아있다 어둑해질 무렵 뒷동산에서 내려왔다.



리쟝 고성_미로 같아 길 잃기 딱 좋다
리쟝 고성 물길 / 뒷동산에서 내려다 본 기와
일일 현지투어 석림


저녁을 먹기 전에 숙소에 잠시 들렀는데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생이 나에게 말을 붙인다. 혼자 왔냐? 나이가 몇이냐? 누가 또 오냐? 그녀는 내게 궁금한 게 많다. 혼자 여행 다니는 서양 여자는 많이 보았지만 동양 여자는 처음이라 궁금했다고 한다. 그녀는 나처럼 여행을 다니고 싶다며, 그동안 내가 어디 어디를 다녔는지? 며칠씩 다니는지? 여행경비는 어떻게 마련하는지? 내가 글 첫머리에 썼던 내용들을 물어봤고,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성실히 대답을 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은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일에 매여서 여행을 원하면서도 못 다닐 것 같다고 한참이나 토로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꼭 여행을 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해 줄 수가 없다. 어차피 여행은 돈과 시간보다 의지와 행동이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 또한 당신과 같은 노동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녀에게 나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날 밤 제임스 힐턴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샹그릴라에서 샹그릴라를 읽자'며 출국 전 배낭에 넣었더랬다. 소설에서는 그저 시공간적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추구할수록 상실하는 '시간'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 힐턴은 이상향이 아닌 현실의 삶, 삶에 대한 태도, 의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결국 모든 질문은 나의 화두와 연결된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쩌면 일평생 숙제처럼 답을 찾아야 하고, 죽는 순간에야 비로소 답할 수 있는 질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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