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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Sep 18. 2018

나는 그녀를 믿는다

안희정 1심 판결문을 읽고 썼다.  

소위 내부 사정을 잘 안다는 거래처 사람이 식사 중에 말했다.

“니들이 다 몰라서 그렇지, 그거 다 불륜이야. 수틀려서 저러는 거야.”

흥분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과장님은 어떻게 아시는데요? 두 사람 사정이라면 과장님도 모르시는 거잖아요.”


톤을 낮춘다고 낮췄지만 날은 제대로 서 있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나를 언제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라면 가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려주지 않는 것만으로 놀라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나는 안다. 이건 불륜 같은 게 아니었다는 걸. 질투에 미쳐서 오뉴월에 서리 내리게 하는 여자 따위가 아니라는 걸. 그녀의 지인도 아니고 캠프 사람도 아니고 관계자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안다. 다른 여자들이 아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안다.     


나도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상처를 삭혔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이 백배는 괴로울 거라는 걸, 네 부모를 수치스럽게 할 거라는 걸, 사람들은 네 행실을 먼저 뜯어볼 거라는 걸, 온 사회가 나에게 가르쳐왔고 그 진하고 독한 배움은 피해자가 된 순간 바로 효력을 발휘했다. 피해를 입는 그 순간에 알 수 있었다. 이건 말을 꺼낸다한들 나만 다칠 그런 일이었다. 나만 ‘그런 여자’가 될 게 분명했다.  

   



피해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건 잘못 표현된 연애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세뇌해보기도 했다.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너무 어렸던 나의 행동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가장 쉬운 건 그냥 그 모임에 나가기를 그만두는 거였다. 그 사람들을 모두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 사람들은 내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그 편이 더 쉬웠지만, 사실 버려지는 건 나였다. 어쨌든 그건 내 일상의 작은 일부일 뿐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도 아니었고, 내게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크게 잃는 것도 없는데 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을까? 어차피 안 볼 인간들. 왜 고래고래 지랄지랄하지 못했을까. 이제는 안다. 말을 꺼내는 것부터가 아플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내가 다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일상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스무 살의 내가 너무 잘 알았던 사실을 인생의 다른 단계를 사는 그녀들이 몰랐을까?    


여성혐오다. 너 따위를 위해 내 일상을 다 버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여성혐오다. 너무 많은 남자들에게 여자는 수십 년 전 이현세 만화에 나왔고 지금은 할렘물에 나오는 딱 그 수준이다. 그 여자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여자’다. 그 여자는 자기 삶이 없다. 남자를 사랑해주기 위해, 성욕의 대상이 되기 위해, 등쳐먹기 위해 존재한다. 남자 외적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남자에게 ‘버림받으면’ 복수를 위해 자기 삶도 던져버릴 수 있고, ‘정조’를 잃으면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이 남자들이 보는 여자는 그냥 이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이 없다. 그들은 우리 삶의 다른 85퍼센트를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지키고 싶은 평범한 삶이 있다는 걸, 직장이 있고 야망이 있고 일상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는 미래가 있다는 걸 믿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폭행과 추행 속에서도 그 삶을 지키기 위해 그냥 살아간다는 걸 인정하지 못한다. 갈라지는 목소리를 애써 꺼낸 사람들은 자기 삶의 큰 부분이 부서져버릴 것을 알고도 선택한 사람들이다. 따지자면 논개지 팜므파탈 따위가 아니다.     


네 번 당했다고, 그 정도면 당한 게 아니지 않냐고 말한다. 이혼녀라고, 세상 물정 알 나이 아니냐고 말한다. 세상 물정을 알아서, 어쩌면 이혼했기 때문에 더욱이 지켜야 할 커리어가 있고 꿈이 있어서 네 번을 참아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지키고 싶었는데, 가해자는 그 남은 희망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이 어떻게 나올지 아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스라지기 전에 남은 한 줌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은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는 그녀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믿지 않을 이유를 찾는 사람들은 꽃뱀의 전설을 찾아 셰도우 복싱을 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한 번도 이야기해보지 못한 자기 삶의 어둠으로 들어가 피를 토한다.


글쓴이

멘토스 

글로 하는 유머에 소소한 욕심이 있는 사람.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가벼운 에세이를 써보고 싶어한다. 그런데 세상이 줄곧 깽판을 치고 뇌는 불에 볶아 익힌 것처럼 조각조각 나서 아이디어도 그 아이디어를 정리된 글로 능력도 잃어버렸다. 유머는 어설픈 것조차 꽤 정교한 거니까. 내 많지 않은 에너지는 모두 분노로 가서 뇌의 조각들은 열기로 찌릿찌릿하다.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옮겨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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