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억압에도 사그라들지 않은 당신의 ‘화’는 차별성 있는 글감이다
글의 주제를 찾기가 좀처럼 어려웠다. 포기했다. 그래서 ‘내 마음에 걸린 일’에 대해 감정 일기나 쓰자고 작정했다. '무엇이 괜찮지 않은가. ‘나만 좀 이상한가’ 싶은 지점은 무엇인가. 솔직히 쓰게 되면 남들에게 욕 먹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반드시 쓰고 싶은 나만의 ‘기분’은 무엇인가'
최근에 가장 기분이 나빴던 일을 떠올렸다. 식당에서 혼자 백반 먹을 때 서빙하는 사람에게 '스마트폰 보지 말고 빨리 먹으라!'고 지적받은 일에 대해 세세히 묘사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스톱와치를 맞추어 두고 2분 동안 한번도 손을 떼지 않고 써 나간 것이다. 손을 떼면 자기 검열이 또다시 올라오므로, 맞춤법이 틀려도 결코 멈추지 않고.
>> 취재를 마치고 밥집에 들어갔다. 허름한 외관이었으나, 손님이 가득했다. 일곱 개의 반찬이 모두 재료도 다르고 조리법도 달랐다. 쌀도 질이 괜찮은지 밥에는 윤기가 돌았다. 벌써부터 만족스러웠다. 나는 촉이 좋아! 3시간 동안의 인터뷰로 몹시 힘이 들었으므로, 급히 먹으면 체할 것 같았다. 천천히 먹고자 스마트폰을 보았다. 검색해 보니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때 '폰 보지 말라'는 호령이 들렸다. 나? 저요? 저? 진짜 깜짝 놀랐다. 너무 너무 창피해졌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내가 또 눈치없이 잘못한 것 같았다. (늘상 하는 생각의 오류. 모든 건 내가 눈치없어서 그런 거라는 자기강박 발동) 빨리 먹고 나가주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오기가 솟았다. 지면 안되지, 다 먹어야지. 지긴 뭘 져? 이기긴 뭘 이겨? 밥 먹으면서 투쟁하냐? 뭐야. 근데 내 기분이 왜 즐거움에서 오기로 바뀌었지? 손해봤네. 그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바쁜데 빨리 빨리 먹어. 폰 좀 보지 말고!" 이럴 때 또 나의 '시발 버튼'이 눌린다. 논리회로가 멈추고 욕과 행동이 나온다. 수저를 내던지고 일어섰다. 계산없이 아무 말이나 내질렀다. "이보세요. 손님에게 지금 대체 무슨 예의세요?" <<
그 다음에는 다시 5분 동안 썼다. 시간이 많을수록 자기검열은 심해진다. 수정할 시간이 많을수록, 초고는 덜 솔직해진다. 자문자답하고, 끊임없이 '왜'를 물어보면서. '그래서 대체 뭘 주장하고 싶어?'라는 훼방의 싸운드에는 "좀 성급해. 기다려. 기다려" 타이르면서 썼다. 글로 쓰지 않으면, 이렇게 세세히 생각하지 않는다.
>> 점심 시간이었다. 바쁜 시간에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재빨리 먹고 비켜줘야 하나?
아니오. 나는 내가 지불한 돈만큼 내 식사를 즐길 권리가 있다.
사람이 많았다. 모두가 같은 지적을 받았나?
아니오. 내 앞에 남자는 이어폰도 끼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야구를 보고 있었는데, 나만 지적 받았다.
대체 왜지? 30여명 가운데 나만 두 번 지적받았다. 처음엔 참았다. 남은 밥을 마저 먹고 빨리 나가려고 했다. 저분들도 힘들어서 그러겠지. 그런데 재차 지적했다. "바쁜데 빨리 빨리 먹어. 폰 좀 보지 말고!"
뭐야. 그 말은 '화풀이' 같았어.
내가 왜 그분의 화풀이 대상이지? 나는 손님의 권리가 없나?
나는 그 30명과 무엇이 달랐지?
그 식당은 인근의 공사장에서 온 인부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손님들 중 한 명이라도 나와 같은 지적을 받았나?
아니오. 밥을 먹는 15분 동안, 정확히 내게만 두 번 지적했다. <<
상황과 감정을 쓰다가 깨달았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도출됐다. 감정은 주장이 되었다. "성별로 차별하지 마시오."
내면의 훼방에 멈칫거리면서, 그 훼방에 손사래를 치면서, 집요하게 '내가 겪은 상황'을 묘사하고 감정을 살펴보았다. 글쓰기를 좌절시키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무시했다. 7분 만에 나는 내가 하고픈 말을 깨달았다.
당신이 화가 났다면, 그 일이 아무 일도 아닐 리 없다. 우리는 그렇게 별 것 아닌 일로 화낼 만큼, 자유롭게 살아오지 않았다. 아무 데서나 화내지 말라고, 웃는 얼굴이 예쁘다고 교육받았다. 그러니까, 화가 났다면 그 감정을 집요할 정도로 들여다 봐야 한다.
“저는 문제의식이 없어요. 그래서 감상적인 글밖에 못 쓰는가 봐요.”
일년에도 여러 번, 같은 토로를 듣는다. 그러면 되묻는다.
“이번 주에 화가 났거나 불편했던 일 뭐에요?”
그 다음에는 일사천리다. 강의실 안은 먼저 이야기하려는 사람들로 웅성거린다. 나는 그중 끝까지 망설이던 수강생분을 굳이 지목해 물어본다.
"길에서 취한 아저씨가 “예쁜 아가씨들, 차려입고 어디 좋은 데 가나 봐?”라고 말했어요."
왜 불편했는지 이유를 물어본다.
"이유가 반드시 그럴 듯하지 않아도 돼요. 상대는 나에게 아무 소리나 ‘쳐 지껄였는데’ 누구 좋으라고 논리적으로 말해야 해요? 친구에게 말한다고 생각하고 솔직한 기분을 말해 보세요.”
그제야 긴장이 풀린 그녀가 말한다.
“저는...저는 취한 아저씨에게 ‘어디 좋은 데 다녀왔어? 무슨 술을 그렇게 드셨어?’라고 묻지 않잖아요."
시작만 하면 된다. 그 다음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감정을 말하기 시작한다.
"취한 사람에게 뭐라고 하면 맞을까봐 무섭고 위축되었어요.
아무 말도 못하고 빠르게 걸어왔어요. 그게 자존심 상해요."
그 취객에게는 길을 걷는 여성을 품평할 권력이 있고, 나에게는 없다. 그 권력 차이가 나를 화나게 한다.
화가 났다면,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다. 물론 처음부터 글의 주제를 찾을 수는 없다. 초고에서는 그저 감정을 쏟아내 보아도 좋다. 초고를 고치고 고치고 고치는 과정에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낼 때까지 시간은 충분하니까.
주장을 채 찾아내지 못했다면, 단지 상황과 감정 묘사만 쓴 초고를 남들에게 보여주자. 수많은 동지들이 각자의 의견을 보태줄 것이다. 그것들을 잘 갈무리하면서 주장을 찾아내도 좋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어떤 감정에 사로잡힌다. 마음에 걸린 일에 대해 잡고 늘어져야 한다. 칼럼 소재는 어떻게 찾느냐고? 남들이 다 괜찮다고 할 때 나만 이상한 것이 있다면? 그곳이 샘이다. 차별화된 주제와 소재가, 당신의 '화' 안에 있다. 여성 필자 각자의 성격과 상황이 다르므로, 다양한 글이 나온다. 그 또한 기쁘지 않은가!
화를 내는 글은 그 자체로 충분히 존재이유가 된다. 표현이 완벽하지 않아도 구성이 치밀하지 않아도 주장이 날카롭지 않아도 괜찮다. 화를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쓴 분노의 언어가 다른 이에게로 날아가, 글을 쓸 용기가 되어 줄 것이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화를 내도 되는구나' 하고.
수십년 간 쓰지 않은 기능이 단숨에 유연하게 작동할 리 없잖은가? 오늘 한번, 내일도 한번, 그리고 또 한번 작동을 하자. 어느날엔 아주 유연하고 매끄럽게 굴러 갈 것이다.
그 정도면 오늘 당신이 분노하는 글을 쓸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