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억압에도 사그라들지 않은 당신의 ‘화’는 차별성 있는 글감이다
나는 ‘따지는 애’였다.
“넌 좀 빠져라. 빠져.”
옆집 할머니가 나를 향해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분의 손녀가 내 남동생의 얼굴에 빨갛게 흉터를 냈는데 그게 왜 잘못된 것인지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반박했기 때문이다. 딱히 내 동생을 사랑해서 한 발언은 아니었다. 일곱 살 때의 기억이다.
“애들이 놀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도무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애들이 놀다보면 그럴 수 있지’가 무슨 뜻이지요? 놀이를 할 때는 친구를 때려도 되나요? 나도 놀다가 신나면 할머니 손녀 때려도 되나요? 놀다보면 그럴 수 있으니까? 폭력은 잘못이라고 유치원에서 배웠는데, 왜 잘못된 것을 옳다고 하시나요? 어른이 아이들에게 틀린 것을 가르쳐 주면 안 되지요!"
정확한 워딩은 기억하지 못하나, 이러한 요지였다. 여기까지 읽고 지쳤을 분들에겐 미안하다. 그 할머니도 지쳐서, 정말로 듣다 지쳐서 혀를 찼다. 이후로 한동안 내 별명은 ‘빠져라, 빠져’가 되었다.
'사랑스럽지도 귀엽지도 않은 어린이'라는 라벨이 붙은 기분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 별명은 나를 주눅들게 했다는 사실이었다. 애칭이 아니었다. 경고였다. 작작 좀 하라는, 따박따박 대들지 말라는, 어른에게 주장을 펴지 말라는, 당돌하게 굴지 말라는. 매일 반복되는 경고.
돌이켜 보니 어렸을 때의 나는, 현재의 내가 되고 싶어하는 성격을 고스란히 지닌 아이였다. '왜냐고 묻는 사람'이었다. ‘자기 주장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약자를 위해 대신 싸우려 하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른 것을 지적하는’ 사람이었고, ‘적확한 논거를 들어 견해를 펼치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누구도 지지해 주지 않았으나, 그렇게 태어났다.
그리고 그 모든 특성에 대해, 다음의 문장으로 지적받았다.
누굴 닮아서 그렇게 예민해
왜 그렇게 까탈을 부려
남 일에 쓸데없이 흥분하지 마라
끝까지 따지고 들지 꼭!
길길이 대들길 대들어
한마디로 하면 될 걸 길게 이야기하니
말을 돌려서 이쁘게 할 줄 모르고
남자처럼 말한다
‘남자처럼’ 말했기 때문에 나는 교정되었다. 집안에서는 친할머니에게 교정을 받았다. 78세의 여성 이남석이 10세의 여성 김은성에게 말했다. “변호사나 되라, 똑똑한 년.”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20세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의 매일 나는 싸웠다. 내 엄마를 울게 하는 조모를 향해 비판을 날렸다. 언제나 3가지 이상의 논거를 댔다. 물론, 그렇게 논리적으로 대응한다고 해도 승리하지는 못했다. 이남석이 마시려던 물컵의 냉수를 김은성의 얼굴에 뿌리며 외쳤기 때문이다.
“변호사나 되라. 똑똑한 년.” 축축하게 젖은 얼굴로 나는 울었다. 주장은 사그라들고 논리는 초라하게 느껴졌다. 초등학생은 그런 감정을 이겨낼 정도로 강하지 않다.
어른이 되어 떠올리니, 그 말은 엄청난 축복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진짜로 변호사가 될까봐 그것도 인권변호사가 될까봐 몹시 주의했다. 정말이다. 할머니의 저주는 나를 옭아맸다. 이후에도, 주눅들지 않고 할머니와 싸웠으나, 마음 속 어린아이는 상처를 입고 어깨를 옹송그렸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면, 그건 내가 말이 많기 때문일 거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너만 유난이야.” 십대 내내 이 말이 가장 두려웠다. 집안에서 충분히 비난받았으므로, 학교에서는 굉장히 주의했다. 남과 다른 생각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대체적으로는 그랬다.
그럼에도 주머니 속의 가시는 티를 내는 법.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선생님이 고쳐주셨으면 좋겠는 것”을 에이포 용지 6장에 걸쳐 작성해 제출하는 바람에 혼자 끌려갔다.
“반 아이들 모두 하나도 안 썼는데, 왜 너만 그렇게 생각하니? 너만 이상한 것 같은데?”
질문과 조언의 형식을 띄었으나, 협박이었다. 부서진 책상이 가득찬 창고 안에서 사십대 남자교사와의 독대가 무섭지 않았을 리 없다. 한 시간 내내 울면서 ‘제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사과했다. “아니. 니가 쓰라고 했잖아?”를 마음 속으로 백번 되내면서.
무려 여섯 장. “종이 좀 더 주세요!” 나와 함께 선생님의 편애와 폭력성과 공정하지 않음을 비판하던 친구들이 연필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내 글쓰기에 몰두해서 전혀 몰랐다. 나는 ‘눈치가 없는’ 아이였다. 그 사건 이후부터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들을까봐 사는 내내 전전긍긍했다.
돌이켜보니, 초등학교 3학년 때의 항소서 6장은 내 최초의 칼럼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길 바라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적었다.
지적받고 교정되고 억압되었으므로, 가지고 태어났던 나의 언어는 성장 과정에서 철저히 은폐되었다.
다만 울음이나 욕설 같은 것으로, 언어는 자신의 존재를 기어코 드러냈다.
과잉된 상냥함으로 미팅을 마치고 온 다음엔 맥주를 따며 한마디, 시발. 자기가 프리랜서 3개월 해보니까 자산관리가 너무 중요한데 제대로 하고 있냐며 묻지도 않은 노하우 알려주는 동창을 만나고 온 날 10년차 프리랜서로서, 시발. 택시 기사에게 수모를 당하고 내리면서, 안 들리도록 조그맣게, 시발.
온화하고 유순한 나를 연기하면서 스스로 몹시 불화하고 불편했으므로.
앞에선 웃고 뒤에선 욕하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화가 났다. 왜 나는 시발 밖에 못하지? 어느날, 시발의 근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저항하고 싶은 대상이 누구인지 명백히 밝혀서 ‘멋쟁이 칼럼’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는, 1시간 만에 포기했다. 너무 어려웠다. 당연했다. 30년 넘게 사용하지 않았던 기능이 작동할 리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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