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가 싫어지거나 울컥 눈물이 난다면, 글을 써야 한다는 신호다
귀 옆으로 넘길 수가 없을 정도로 짤막하게 잘린 너의 머리칼. 검게 윤이 나는 머리칼 아래 달랑이는 진녹색의 납작한 이어링. 수업을 마친 뒤, 작업실 마당에서 고요히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솜의 모습을 건너다 보았다. 여성들이 모인 글쓰기 수업 2시간은 밀도가 에스프레소 같다. 짙고 진하다. 여러 명이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털어낸다. 중간 중간, 서로의 말소리가 공중에서 뜨개질처럼 엮이기도 한다.
대사가 많고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영화 한 편을 본 것처럼, 암전 뒤에는 조금 멍해질 수도 있다. 탁자에 준비된 초콜릿과 사탕만으로는 해갈되지 않는 기분은, 이 땅에서 한국여성으로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아온 고유의 감정이 쌓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후 한 시의 햇볕 아래에서, 첫 숨을 몰아내쉬며 느낄 너만의 완벽한 고요를 떠올리니, 몹시 부러워졌다. 언젠가는 함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또는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수업도 만들 수 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요즘 종종 드는 생각이 있다. ‘솜처럼 숏컷을 할까. 책을 읽으려 머리를 숙여도 아무 것도 방해하지 못하게.’ 여자들이 무언가를 행동하려 마음 먹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또는 사회가 그녀를 세뇌해 온 여러 말들이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운다. 나쁜 교육이다.
머리칼을 자를 생각을 할 때, 누군가는 ‘숏컷은 깡말라야 간지가 나지’ 또는 ‘이상은 고준희, 현실은 곽도원’같은 인터넷 밈을 떠올릴 테다. 나에게 그 훼방의 사운드는 첫 회사 동료 박 언니의 수다다. 회사를 그만둘 수가 없어 긴머리를 그만두고, 출근했을 때였다. “어떡할려 그래. 결혼할 때 핀 100개는 꽂아야겠다.” 그리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그날을 위해 머리에 손 안대.” 정색한 나를 보고 단발머리인 선배가 자기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바꾸려 애썼다. “단발이면 핀을 두 배는 더 꽂아야 돼. 신혼여행에서 린스 한 통을 다 썼을 걸. 그거 완전 고문이야, 고문.”
거짓말 같지? 고작 10년 전 일인데도, 내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결혼식에서는 긴 머리를 업스타일로 만들어야만 웨딩드레스와 어울린다’고 말한다. 숏컷의 신부를 상상하지 못하는, 아니 결혼식을 하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저에 넘쳐난다. 우리가 함께 읽은 최은영, 박민정, 박완서, 록산 게이, 요네하라 마리의 세계에서 그들은 악인도 못되고 조연1이 되겠지만. 여전히 바깥 세상에서는, 다만 컴퓨터 로그인을 하자마자 맞닥뜨리는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아직 조연이다. 긴 머리를 틀어올리고 아름다운 목선을 드러낸 화사한 신부가 주연이다.
다음엔 벨트였다. 박은 내 허리께를 보며 웃었다. “여자가 벨트를 안 하면 헤퍼보여.” 나는 벨트가 하나도 없었다. “헤벌레~하니 다 허락하는 것 같잖아.” 29세의 나는 당황하고 얼굴이 빨개져 본심과 다른 이상한 말을 외치는 게 버릇이었다. (영화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 캐릭터를 본진으로 여기는 이유다)
“돈 없어서 벨트 못 사요.” 외치고는 화장실에 달려가 버렸다. 혼자 있고 싶었다. 박 언니는 내가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라, 괴로웠다. 나는 해맑게 웃긴 사람을 미워하지를 못한다. 내가 진정 상처받기 전까지는.
하루는 점심으로 백반을 먹고 돌아오다 내가 변태성욕자에게 당했다. 여러 명이 함께 아이스 커피를 들고 걸었는데, 그중 내 오른쪽 귀가 포착되었다. 그는 내 귀에 “나도 좀 빨자.”라고 말하고는 빠르게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당황해서 모두에게 말했다. 세 명의 여자들이 ‘드러운 거 잊어 잊어’라고 위로해 주었다.
10분쯤 후. “나도 좀 빨자.” 횡단보도에 내려선 내 등 뒤에서, 나보다 약간 높은 곳에 올라서서 내 왼쪽 귀에 대고 박 언니가 속삭였다. 그렇게 내 양쪽 귀가 오염되었던 날.
악의가 아니었음을 안다. 그녀는 개그에 욕심이 있었다. 자기 말로 ‘깡촌에서 자랐고’ ‘깡촌에서 가장 큰 행사였던 전국 노래자랑 예선에서 일등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비꼬는 게 아니라) 굉장히 웃겼다. 문자 그대로, 웃다가 배가 아플 지경으로 웃겼다. 박 언니가 없었다면 사무실의 부조리를 견딜 수가 있었을까. 고객 전화에 당황하면 늘 ‘고마 내한테 넘기라’라고 입모양으로 말해주던 그 다정함을, 여전히 기억한다. 하지만 유머와 개그는 굉장히 위험한 도구다. 단 10초의 폭소를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다 쓸 준비가 되어있다. 타인을 웃기고 싶어하는 사람은 종종 자기 발에 걸려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여간, 그 횡단보도에서 나는, 몸이 굳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 마세요.” 목소리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또는 그녀가 자기 말을 마치자마자 호탕하게 웃었기 때문에, 분명히 못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워진 나의 조그만 목소리를 모아서, 지금 랩탑을 부술 기세로 글을 쓰고, 쩌렁쩌렁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그런 말들은 셀 수도 없다. 나는 여전히 길에서 바나나를 먹을 적마다 약간 불편한 기분이 된다. 조심스레 똑똑 떼어먹는 자신에게 넌더리가 난다. “여자들 아침에 길에서 바나나 먹으면 발딱 서. 오랄 같아.”라고 동창의 친구가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내가 이화여대 출신임을 밝힐 때, 상대의 반응을 걱정한다. “너 이대야? 나 어제 이대생 야동 봤는데. 그런데 넌 명품백 안 들었네?”라는 주정을 들었었기 때문이다. 말들, 말들, 말들. 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 검은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묻고 다시는 비어져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들. 이외수의 ‘단풍은 화냥년’ 같은. 단풍을 볼 적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앞으로 내 뇌주름에 달라붙어 있다가 자동연상되어 떠오를 더러운 말들. 나는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싶은 기분이 된다.
그 말이 나를 좌지우지해서가 아니라, 자동연상법으로 소환되기 때문에 괴롭다. 매일 페미니즘 서적을 읽어도 여성이 쓴 시와 소설으로 뇌를 세척해도, 그 더러운 말들은 완벽히 소거되는 일은 없다. 그런 세상은 아직 없다. 인간의 기억을 삭제하는 프로그램이 개발되기 전에는.
'빻은 말’ 대사전을 만들어서 큰 불에 태우자고 학생들과 우스개 소리를 나눈다. 여성의 마음에는 스스로의 존재를 위축시키는 말들이 자리잡고 있다. 어느날 울컥 눈물이 난다면, 어느날 문득 욕을 뱉고 싶다면, 어느날 나를 비춘 거울을 부수고 싶다면, 그건 ‘당신이 쓰거나 말할 때’라는 시그널이다. 아직 언어로 발화되지 않은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가 가장 쉽고 즉각적인 감정 반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감정은 몹시 현명해서 당신을 지켜준다. 당신이 글로 쓰거나 말로 하지 않으면 기어코 어떤 모양으로건 솟아오른다. 지치거나 체념하거나 죽거나 위험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말들과 그로 인한 나의 감정을 글로 쓰면, 감정을 콘트롤하는 데에 적절한 도움이 된다. 내가 만든 글 속 세계 속에서, 분노와 모멸감, 증오를 충분히 느껴야 한다. 다 쓸어내버리고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하면 된다.
담배를 다 태우고 대문을 나서는 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오늘 저녁에 눈물이 날지도 몰라’ 처음으로 내밀한 감정을 글로 쓰게 되면, 당장은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화가 올라와요, 자꾸”라고 토로하는 학생도 있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아무렇지 않다면, 다음 시간에 그럴 것이다. 개중에는 대번에 침착해지고 개운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누구는 감기약을 먹고 대번에 기침이 멎고 누구는 앓을만큼 앓다가 낫는 것처럼 모두의 반응이 다르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하룻밤을 정해서, 대한민국 여자들이 들어온 모든 성차별적인 언행과 모욕적 발언을,
모든 길과 모든 바닥에 물감으로 쓴다면 다음날 아침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그 물감을 하루아침에 물로 다 쓸어버린다면.
그 상상이 나에겐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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