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끼고 젊은 시절의 나와 너를 읽을 거예요
어제도 말했다는 사실을 잊고 그는 또 내게 말한다.
“내가 이 책의 모든 뜻을 완벽히 이해하고 싶어요. 50년만 기다려 줄래요?”
남프랑스에서 온 남자 B(바티)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작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와 작고 하얀 닭 두 마리와 아주 작은 텃밭을 일구면서. 처음에는 매일 아침 눈물이 났다. 우연히 사랑에 빠져버렸을 뿐인데, 두 명 중 누군가는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나라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고 막막해서. 머리칼을 두 올 뽑아 나와 그를 한 명씩 더 만들어 각자의 나라에 살게 하면 좋을 텐데, 아직 그런 테크놀로지는 발명되지 않았으니까.
코끝이 매워지려고 하면, 그 마음을 이야기로 만들곤 했다. 그러면 그가 등 뒤에 다가와 서툰 한국어로 내가 쓴 문장을 읽었다.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읽었으므로 그저 공중에서 리듬과 멜로디가 되어버린 것들. 사랑하는 사람이 고대 암호를 해독하듯 내 글을 낭독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노라면, 검은 우주에 나란히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에 담긴 원고는 2010년부터 드문드문 블로그에 쓴 일기에서 시작됐다. 여기에 2018년 여름 몇 달 동안 집중해서 쓴 것을 더했다. 올해 여름 사흘 간격으로 글을 SNS에 공개했기 때문에 ‘단숨에 쓰는 타입이구나’라는 말을 종종 들었으나, 그렇지는 않다. 몇 년에 걸쳐 뭉클한 덩어리의 상태로 고여있던 것이 반듯하게 글의 형태가 된 것일 뿐.
명색이 국문과 졸업생이지만, 단 한 번도 글을 쓰고 싶다고 소리 내 말하지 않았다. 학교엔 이미 책을 냈을 정도의 천재들이 수두룩했다. 좋아하는 글에 밑줄을 치기 위해 색색깔의 펜을 모을 정도였으면서도, 글을 쓰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지옥을 맛보고 그 지옥을 견디기 위해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쓰는 일을 사랑한다고.
잡지에 기사를 기고하는 일로 밥을 벌어왔기 때문에 늘 ‘글을 쓰고 있다’고 여겼으나, 정작 내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 안에 차곡차곡 글이 쌓여왔다는 사실이 기쁘고 안심이 된다. 유랑을 하든 장사를 하든 방황을 하든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든 그 모든 삶이 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만으로 몹시 행복하다. 이제는 안다. 특별한 순간만이 글이 되는 건 아니다. 사소한 순간을 오래 바라보면, 그건 글이 된다.
울고 분노하고 스스로가 부끄러워 잠 못 이루고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질투하고 애가 타고 사랑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해 자책하는 그 모든 순간에, 나를 완벽히 사랑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럼에도 무언가는 남는다. 소심한 사람들은 그 무언가를 품고 있다가 밤새 글을 자아낸다. 물레를 돌려 실을 자아내듯, 현실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어딘가에 새겨둔다. 마치 평행우주를 하나 만들 듯.
책을 쓰면서 나는 나를 몹시 좋아하게 되었다. 그 점이 가장 기쁘다. 내가 울보라서, 내가 소심해서, 내가 겁이 많아서, 내가 언제나 어색한 사람이라서 좋았다.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사람이라, 자랑스러웠다. 행복한 여름이었다. 잊을 수 없는 계절을 선물해 준 나의 편집자 흔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B, 우리의 50년 후를 기다려요.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서 함께 책장을 넘길 거예요.
영원을 믿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