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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Apr 11. 2019

생리컵 빼러 온 건 제가 처음인가요?

첫 생리컵 도전은 산부인과에서 완성됐다

 산부인과에서 생리컵을 뺐다. 병원을 나섰을 때 가방 안엔 몇 겹의 비닐에 포장된 생리컵이 있었고 나는 이 경험을 여초 커뮤니티 추천/후기방에 올려야 할까 건강방에 올려야 할까 고민했다. 


며칠 전, 생리가 끝물에 달하자 첫 생리컵이 잘 안 빠진단 걸 알았다. 나는 페미사이클이라는 고리형 생리컵을 쓴다. 그 중에서도 낮은 자궁경부용이다. 고리에 손가락을 끼고 빼는 방식인데 손끝에 생리컵은 닿는데 고리를 잡고 뺄만한 유효길이엔 턱없이 부족했다. 


낑낑대다가 일단 포기하고 손을 닦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켜 생리컵, 안 빠짐을 검색했다. 누군가는 이케저케요로케저러케 하면 빠진다고 한다. 


조언을 염두에 두고 창을 스크롤 했다. 병원에 가서 빼라는 말도 있었다. 병원비는 약 2만 원이었다. 그러니까 손가락이 짧아서 생리컵에 닿지 않는다, 유전적 결함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자연종의 다양성 문제로 돈을 써야 한단다. 


굳이? 굳이 병원에 가야 하나. 같은 값이면 배달료 2000원 붙은 교촌치킨 레드콤보를 시키는 게 더 행복 효용이 높지 않을까. 아깝다. 다시 생각해도 아깝다. 똥 싸듯이 힘주면 잘 빠진다는데.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는다. 


몇 번의 헛방 후 평일 점심 동네 산부인과에 나는 앉아있다. 병원 환자는 나뿐이었다. 데스크에 두 간호사는 생리컵이 안 빠진단 내 말에 동공지진을 내며 동요했다. 자기들끼리 말을 전하며 킥킥대는 것도 들었는데 민망함에 온몸이 경직됐다. 


이러다 질근육까지 굳어버리면 몹시 곤란하다. 이럴 땐 먼저 유난 떠는 게 낫다. 여차하면 "저기, 생리컵 빼려고 온 환자 없었죠?" 하고 말을 때려야겠다. 


의사 선생님은 오랜만에 왔다며 안부를 물었고 결혼 여부를 물었다. 그저 매뉴얼 질문이지만 흐름이 요사스러웠다. 결혼도 안 한 사람이 생리컵이라니, 타박을 들은 것 같아 기가 죽었다. 의사로서 생리컵은 어떻다며 부연설명 없는 말만 주더니 시술실로 가라 했다. 


언제였는지,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내시경을 하고 난 뒤 벌벌 떨다 바지를 거꾸로 입고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거기가 여기였던가? 다리 아래로 하얀 생리대를 찬 팬티가 힘없이 떨어졌다. 


초록색 의자에 올라타 다리를 하늘로 올리고 흰 종이 위에 엉덩이를 올렸다. 조치를 기다리며 간호사님이 빼주시는 거냐 물으니 의사쌤이란다. 쪽팔리다. 성기를 이성에게 내보여서인지. 생리컵이 안 빠져서 여기까지 온 거여서인지, 뻔히 답을 알면서 일말의 희망을 가져서인지 모르겠지만. 시야 가림용 커튼이 닫혔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애국가를 재빨리 외웠다. 


차가운 기구로 질구를 고정시키는 느낌이 났다. 집게로 금방 빼는 줄 알았는데 깊이 들어갔다며 "보인다, 보인다" 소리만 들렸다. 이거 이제 보니 유사 출산 체험 같잖아. 알 낳는 거북이마냥 아래로 힘을 줘서 의사쌤과 협업해야 하는데, 긴장감에 그러지 못했다. 무릎께를 쓰다듬으며 힘을 빼라는 간호사분의 지시는 따뜻했지만 힘을 빼는 법을 배워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링거 맞을 때 배운 대로 손을 주먹 쥐고 풀고를 반복했다. 아, 이거 힘주는 방법이었지….


아프다. 그래도 고군분투하는 커튼 너머 상황을 보면 참아야 했다. 내가 긴장해 힘을 줄수록 아군을 곤란케 한다는 아이러니. 이거 만화책에 자주 나오는 '원치 않게 적에게 몸을 뺏겨, 울면서 아군을 공격해 날려버리는, 적이 된 우리 편' 같네. 중간중간 "아파요"가 목 끝에서 울렁대는 중 커튼 바깥에서 승전보가 울린 듯했다. 다만 피가… 피가…  후드득 외부로 흐르는 게 오감으로 느껴졌다. 의료진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다 내버린 줄 알았던 부끄러움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마무리 매뉴얼 질문으로 생리컵 말고 또 빼야 할 건 없는지 물었다. 아쉽게도 그런 취미는 아직 없다. 네, 생리컵이 다랍니다.


처치가 끝나고 의사 선생님이 손을 닦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느껴졌다. 의료진은 못볼 꼴을 본 듯 생리컵을 버려주겠다고 했지만 5만 원 안 되게 주고 산, 첫 생리컵을 이렇게 버린다는 게 영 아까웠다. "그냥 가져갈게요." 

이름도 낯선 생리컵을 소중한 유품처럼 귀중히 여기는 걸로 보였을까? 진료가 끝나고 비닐에 몇 겹으로 싸인 생리컵을 받았다. 재차 이걸 왜 가져가냐는 질문도 받았다. 비싸서요란 말을 가슴에 숨겼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서요" 내가 생리컵을 빼려고 병원에 온 일도 어떻게 될지 몰랐던 일이었으니.



결제를 하니 1.6만 원쯤 나왔다. 내가 한 시술명을 물으니 '질 이물질 제거술'이라고 한다. 간결해서 멋들어진 이름이다. 1분 시술에 2만 원은 아깝지 않나며 무지 가성비를 따졌던 걸 반성했다. 예상보다 오래 걸리고 쉽지도 않은 시술이었다. 거기다 피까지 보이고 흘렸으니. 돈, 얼마 없어도 얼마든 드리겠습니다. 겸사겸사 전문가에게 자궁경부 높이도 잰 상황이 돼서 내 자궁경부 높이보다 낮은 생리컵을 쓰고 있단 것도 배웠다. 그래서였구나. 어색해서 대충 재고 끝냈던 비전문가의 자체 측정은 실패한 셈이었다.  


이제 집에 가면 되는데 괜히 민망한 분위기를 못 견디고 데스크 앞에서 넉살을 부렸다. "제가 그, …처음인가요?" 많은 것이 생략된 질문에도 간호사분은 내가 이 병원에서 생리컵을 빼러 온 최초의 환자라고 친절히 확인사살해줬다. 럭키, 자기소개 프로필이 하나 늘었다. 그런 걸 왜 쓰냐는 타박 섞인 질문도 잊지 않고 배달됐다. 마치 그 말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진정 생리컵을 포기할 수 없다며 그 편리함과 경제성을 열띠게 홍보했다. 홍보가 끝나가는데도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아서 그제서야 발을 돌렸다. 그들은 내게 영업됐을까? 그러기엔 첫인상이 썩 좋지 않긴 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언젠가 어떤 계기로 생리컵 비공식 영업왕이 될 수도 있는 거다.


혹여 못 되더라도 나는 별일없이 편히 생리하고 있을 거다. 손해 없는 장사다. 


버들 
하고 싶은 걸 해도 혼나지 않는다는 걸 배워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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