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붙들어매쇼, 사노 요코는 그걸로 밥벌어먹고 살았습니다
“지난 주부터 갑자기 글 쓰는 것이 신나고 편안해졌어요.”
R은 놀라운 비밀을 털어놓듯 말했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한 번 읽고 난 뒤 글을 써요. 저는 원래 장난기도 많고 남의 뒷담화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글에서 그런 면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사노 요코는 세상의 짜증나는 것에 대해 욕을 막 하더라구요? 자신의 괴상한 면도 그대로 드러내구요. 그 글을 읽으면 해방감이 느껴져요. 나를 가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어서 설레게 돼요.”
글쓰기 수업 한 달 만에 자신의 글쓰기 동력 하나를 찾아낸 R이 부러웠다. 야, 나는 잡지기자일을 수년 해도 내 장점이 뭔지를 몰랐었다. 그가 쓴 조각글에서는 장난기와 짓궂음, 싫은 것을 끝끝내 물고 늘어지기 같은 특징이 흘러넘쳤다. 점잖고 모범적인 (그러나 자기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작가 말고) 자신 안에 이미 있는 개성이 극대화된 작가를 롤모델로 찾아내고 만 거다. 멋졌다.
그의 조각글들은 인상적이었다. 비판의식이 넘치는데 장난기가 있어서, 어둡지 않고 경쾌했다. 그 중 가장 장난스러웠던 글은 ‘못하는 사람만 모아놓은 춤 클래스에 꽂혀서 몸치 멤버들을 잔뜩 모으며 즐거워한 일을 쓴 조각글이었다.
“생각해봐, 다 못해. 선생님을 완전 당황하게 만드는 거야!”
“그게 뭐가 재밌어?”
“아니야. 기다려봐. 진짜 재밌을 거야.”
논리도 없이 그냥 우기면서, ‘시간은 많지만 뭘 할지 모르는 결정장애 사람들을 찾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었다. 취미로 연극을 하는 그녀는 발성이 남달랐다. 좋은 성량과 확신에 가득찬 딕션을 장난에 소모하다니, 사노 요코의 거침없는 수제자 같았다.
속이려면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확신에 가득차서 타인을 유혹한다. 좋아, 진짜 재밌을 거야,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럼, 생각해봐.”라며 상대에게 기회를 주는 척 한다. 고민하려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진짜 재밌겠지?’ 같은 멘트를 속삭인다.
보통 이 정도 쓰다가 ‘현타’가 오기 마련이다. ‘이런 것을 글로 써도 될까? 욕 먹지 않을까? 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무릇 작가라면 이런 자신의 장난기를 감추거나 혹은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의 에세이스트 사노 요코는 이토록 솔직하고 시니컬할 수가 없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펴고는 ‘이런 걸 써도 돼’ 싶은 것들에 밑줄을 쳐 보시라. 모든 페이지에 쳐야 된다. 그러므로, 포기!
오래전부터 느꼈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인물은 풍채가 훌륭하다. 철학적이며 지적인 모습이 기품 있고 평온하게 느껴지며, 눈에 깊이가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증오하는 사람이긴 해도. 부시를 보면 몹시 부끄러운 인류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빈 라덴이 어떤 악당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무런 진실도 알지 못한다. 사고방식의 기준 따위, 적어도 나에게는 없다. 9.11 테러로 3천 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지만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는 4만 명 이상의 시민이 죽었다. 이런 게 정의인 걸까.
911센터 앞에서 이야기했다간 당장 총알을 피할 수 없는 발언이다.
오사마 빈 라덴을 보고 ‘잘 생겼다’는 불경한 생각을 해본 적 없느냐고 했더니 수강생들이 속 시원하게 웃었다. “확실히 눈에 깊이가 있어요.” “배우 얼굴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사노 요코 씨, 덕질 좀 하시네요.” 말해보지 않은 것을 속시원하게 말하면, 온몸이 간질간질하니 기분이 좋다.
글에서 오사마 빈라덴과 ‘인류의 수치’ 부시 전 대통령의 외모를 비교하는 것은 글 후반부의 ‘이런 게 정의인 걸까’ 까지 이르기 위한 장치인 걸까. 독자를 방심하게 하기 위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작가의 맘을 우리가 알 도리가 있나. 에세이 읽기는 언어영역 시험이 아니니까. 우리는 이미 사노 요코가 ‘겨울연가’ 욘사마의 열혈팬이어서 한국에 여러 번 방문한 ‘얼빠’임을 알고 있다. 사고방식의 기준이나 세계의 정의를 논함에 앞서, 그녀는 정말로 빈라덴의 핸섬함에 대해 생각해 봤을 만 한 사람이다.
섹스리스라서 할머니긴 해도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일흔에 가까워지니 거의 대부분의 남자가 귀엽다고 말한다. 누구라도 껴안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지금보다 서른 살 젊었다면, 20년 만에 만난 잘생겼던 남자를 현관에서 "잘 지냈어?"하며 껴안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변태 중년 여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싫었고 행실에도 신경 써야 했으며 태도도 분명히 해야만 했다.
'할머니'가 자신을 섹스리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너무 좋아서 책을 껴안고 싶어진다.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작가인데다 무척 유머러스했던 박완서 작가를 떠올렸지만, 이런 종류의 유머를 구사하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에세이스트? 조앤 디디온을 떠올리자, 더욱 어렵다.
급기야는 신주쿠 지하도에 뒹굴대는 홈리스 아저씨가 부럽다고 말한다. '귀찮아, 지진이 와도 도망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들 방에 들어가서 이성을 잃고 “이 팬티는 뭐야, 그 컵은 언제부터 거기 있어. 너 돼지니? 돼지도 시간이 되면 똑바로 일어난다‘고 꽥꽥댄다. 자신은 게으르므로 늘 부지런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아들이 성실하고 근면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작가의 태도는 유머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서, 슬픔과 비참함조차 그녀는 자신답게 다룬다. '얘, 암 걸리니까 남편 밥 안 차려도 되어서 인생 처음으로 행복하다, 밥순이보다 암순이가 낫다'며 친구들 배꼽을 빼놓은 여인을 알고 있음에도, 암 환자라면 고독한 투병기만을 떠올린다. 사노 요코는 자신의 질병에도 가차없다. 암 선고를 받고 유방 절제 수술을 받은 그녀는 수술한 다음날부터 매일 담배를 피우러 집에 걸어간다. 자리 보전한 채로 한드를 보다가 턱이 틀어진다. 모은 돈을 털어부어 재규어를 지른다. 그 와중에 담당의가 아베 히로시를 닮은 엄청난 미남이란 점에 흥분한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 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나는 저 이야기를 아주 안전하게 쓰는 방법을 수십가지는 안다. '인생이 유한하다고 생각하니 매분 매초가 소중하다. 우울증마저 사라졌다. 남은 날이 귀하고 값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로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저런 문장은 사노 요코만이 쓸 수 있다. 눈치를 보지 않는 글쓰기다. 타인과 자신, 모두의 눈치를.
쓰고 싶은 것이 없다거나 뭘 쓸지 몰라서 쓰다 만다는 고민을 자주 듣는다.
그가 나의 친구라면
'야, 싫어하는 거 써......나한테 투덜대지 말고 글로 쓰라고. 천일야화가 될 걸' 이라고 말해준다.
'음. 물론 네가 좋아하는 은유 작가님처럼 우아하고 품격있는 글은 못 쓰겠지?' 라며 킬킬거린다.
독자의 마음을 힐링시키는 감성 에세이스트가 되겠다면야 모르겠지만,
비웃고 싶은 것, 짜증과 불평, 거슬림, 불편함과 불만 등을 쓰는 것만으로도 쓰기의 에너지가 차고 넘친다. 그것을 잘 쓰면 듀나 작가도 되고 사노 요코도 되는 것이겠지. 비평의 달인은 거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솔직하게 바라봐야 한다. 뭐가 싫은가요? 뭐가 거슬리나요? 뭘 가지고 킬킬거리고 싶은가요?
우리 모두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쩌나, 어리석은 마음을 들키면 어쩌나 싶은 '눈치보기'를 거두면 어떻게 될까. 매일 매일 쓸 것이 넘쳐서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글감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욕 먹는 게 두렵다면? 누구도 상처 주지 않는 착한 글을 쓰고 싶다면?
'이 거지같은 세상에서 논란 없는 글은 쓰는 것은 반칙'이라는 말로 대답하고 싶다.
* <책읽아웃> 봉태규 님 출연분에서 김하나 에세이스트의 발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