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을 강화하는 사회에서 글쓰는 일이 두려운 것은 당연하다
언제나 기분은 개떡같았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는 시점부터 그러했다. 남들도 나처럼 개떡같은 기분을 가지고 노력해서 살아가는 줄 알았다. 혹은 기분에도 국가가 있어서, 이를테면 기분 유러피언과 기분 한국인이 구분되어 있다고 상상해 버렸다.
내 성향에는 타고난 쾌활과 유쾌가 있어서 내면의 불편감을 잘 메이크업할 줄 알았다. 이를테면 넷플릭스 TV쇼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레베카 번치를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언제나 드라마틱한 표정과 포즈, 헤더와 발렌시아보다 두세톤 높고 빠른 목소리. 웃을 때도 울 때도, 표정은 이모티콘처럼 확실하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낯을 가리지 않고, 열정도 호기심도 많다.
하지만 다이내믹하고 드라마틱한 성격만큼, 내면의 불편감도 상당하다. 문제는 언제나 용암처럼 부글거린다. 언제나 나는 후지산. 활화산처럼 화끈하게 터져버리지도, 그렇다고 호수처럼 고요하지도 않은.
https://www.youtube.com/watch?v=vrPrr4wmnJ4
나의 개떡같은 기분의 주 원인은 내가 1등러라는 점 때문이었다. 타고난 1등러 성향에 한국여성으로 교육받은 ‘완벽해지되 언제나 겸손할 것’이 합쳐지니, 분열이 팝콘처럼 24시간 내내 튀어올랐다.
예컨대 이런 식. 시험에서 1등을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에 밤을 새운다. 1등을 한다. 2등부터 54등까지 나를 시기할까봐, 전전긍긍한다. 고로 불편하다. 가끔 2등이나 10등을 한다. 어쩐지 겸손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편안한 것도 잠시, 이내 이 상황도 불편해진다. 내가 1등이 아닌 사회는 내게 잘못된 사회라고 교육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공부만 좋아하지는 않아서, 1등러의 암흑 기운은 인생의 모든 장면에 스며 들었다. 파티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이어야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반성문을 쓴다. “혼자 너무 떠벌댔어. 재수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거야.” 파티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만 끄덕거린 날은 돈과 시간이 아까워 잠이 안 온다.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이럴 거면 집에서 책이나 읽었지. 아, 향수와 파운데이션 아까워 죽겠네.. 이렇게 살면, 인생의 단 하루도 평온할 수가 없다. 아주 불편하거나 조금 불편한 날의 릴레이일 뿐.
나는 뼈 한국인으로 자랐다. 나의 유년기에 가장 지분이 컸던 감정은 ‘1등이라고 교만했다가 한번에 곤두박질치는 상상’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동화책의 주제가 그러했다. <빨간 신>의 카렌은 교회 예배 때 반짝거리는 빨간 구두를 뽐내고 싶어하는 마음을 품었다가, 두 발목이 잘리기 전까지 춤을 추는 벌을 받았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교만과 허영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사회 밖으로 내동댕이친다고 배웠다. 마땅히 지녀야 할 자긍심과 자부심, 그 것들이 빈 자리에는 다른 감정이 잽싸게 끼어든다. ‘더 잘해야 할 것’같은 마음이 이글거렸다.
못하면 우울하고 잘하면 불안한 한국인. 평생, 단 한번의 완벽한 휴가가 없는 한국인.
아아, 나에게 70년대 박정희 키즈의 기운이 스민 것일까, 운도 없지.
몇년 전,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일과 라이프 스타일의 모든 요소를 재정비했다. 통장 잔액 말고 마음을 들여다 보는 일에 나날을 보냈다. 불편감이 들 때마다, 감정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글을 쓰며 과거의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마음 공부에 관한 책들을 사 모았다.그러다 한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강의를 열었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서, 조금의 비난도 받고 싶지 않아서, 너무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머뭇거렸던 프로젝트들을 꽤 많이 시도했다. 여러 불편감을 직면하고 수정해 나갔는데, 그래도 여전히, 끝의 끝까지 남아있을 것 같은 감정 중 하나는 ‘칭찬을 받으면 긴장되는 기분’이다.
무엇을 잘하거나 칭찬을 받으면, 앞으로도 계속 잘해야 할 것 같고 전보다 더 잘하거나 최소한 실망을 시키지 말아야 할 것 같아서 어깨가 경직되거나 확실하게 개판을 쳐 버리는, 이른바 ‘완벽주의자’들에게 브레네 브라운 박사의 연구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의 책들은 완벽주의자들에게 코란이자 성경책이다. 본래 브라운 박사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을 연구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왠걸. 리서치 대상이 된 사람들이 털어놓은 감정은 (유대감은 커녕) 소외와 단절, 그리고 수치심이었다. 그가 말하는 ‘수치심 shame’의 여러 요소가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기분’이다.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 그 종목에서만큼은, 한국 여성인 내가 우위를 차지할 자신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데 익숙하니까.
상사와 시부모에게 말한다. “부족한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이 좋게 상을 타면 말한다. “저에게 과분한 상입니다.”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며 고백한다. “제가 글을 써도 될까요?” (나는 너무 놀라서, 이 질문의 속뜻을 여러 번 물었다) 우리의 언어는 수치심을 자극하는 데에 충분하고 또 충분하다.
언제가 자신의 부족함을 염려할 것을 권장하는 사회. 브레네 브라운 박사는 미국이 그러한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면, 그것은 911사태 후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탓이라고 진단했다. 안전에 대한 믿음은 송두리째 흔들렸고, 사람들의 내면에는 크나큰 상처가 남았다는 것이다. 역경을 겪으면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서로를 치유하려 노력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분노의 겹은 얄팍해져서 사소한 일에도 튀어나온다. 서로가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기게 된다. 스스로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생존본능이 강해지면, 당연히 그렇게 된다. 서로 비교하고 서로를 소외시키는 사회 속에서, 개인은 끝없는 수치심만을 강화한다.
쓰다보니, 내가 아주 잘아는 곳이 떠오른다. 내가 선 땅이다. 한국이다.
이 수치심은 환경적이고 후천적이다. 내가 나고 자란 땅의 토양은 수치심을 배양하기에 최적의 환경이기 때문에. ‘까라면 까야’하고 ‘안되는 일도 되게 만들기’ 위해 직원을 관리하는 곳, 직원을 관리하기 위해 멸시와 조롱을 사용하는 곳, 남의 외모나 삶의 방식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것이 일상화된 곳. 끊임없이 사람들의 순위를 매기는 곳. 위험을 감수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도했다간 인생이 한방에 가기 쉬운 곳. 자신의 경험과 의견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모난 돌이 정맞는’ 곳.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곳. ‘남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하니까 결혼도 출산도 양육도 해야 하지만, 이혼은 하면 안되는 곳. 이곳이다.
우리의 문화를 떠올렸을 때, 사람들이 “저같은 사람이 글을 써도 될까요?”라고 묻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잘쓰지도 못하는데….”라고 머뭇거리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글을 너무 솔직히 쓰면, 나도 몰랐던 내가 튀어나와서 괴로워지는 건 아닐까…” 두려워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글쓰기는 매순간 결핍감과 부족감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수치심이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환경을 재조직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 매일, 책상에 앉으며 나의 수치심을 마주본다. 그것은 분명히 있으므로 차라리 직면하고 인정하자.
글쓰기에도 ‘취약성’이 문제가 된다. 취약성은 약점이 아니라, ‘상처받기 쉬움’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나의 진짜 감정, 나의 진짜 역사를 써내려 갈 때, 우리는 취약함을 느낀다. 완전히 벌거벗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 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불확성하다. 나의 고통과 불안, 괴상함, 인생에서 진심으로 바라는 소망에 대해 쓴다면 위험해질 것 같다. 혹시나 독자가 생겨서 그들이 내 글에 대해 호불호를 가지게 된다면, 나는 감정적 리스크를 감수해야 될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안전지향적으로 나아간다.
자, 최대한 객관적으로, 절대로 정치적이지 않게, 나의 성별과 이야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완전무결한 글을 쓰고 싶어진다. 쓰는 일을 머뭇거리는 채로, 다른 사람이 쓴 글의 단점을 찾아내는 일을 즐긴다. 용기를 품고 스스로의 취약성을 견디면서, 써내려간 글을 심판한다. “요즘엔 개나 소나 글 쓰네?” 더 안전해진다면, 아예 글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 쓰지 않는 일이 가장 안전하다. 가장 완벽한 글은 쓰지 않은 글이다. 써진 글에서는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낼 수 있다. 제목도 문체도 구조도 마무리도 어떻게든 더 나아질 수 있다.
“야,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미치겠다.” “내가 가장 잘쓰고 싶어.” “이 글을 내면 욕을 먹을 거야.” 학생들에게 자주 농담을 건다. “쓰고 싶지 않은 소재 있어요?” 저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 오늘 쓰자구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 이상한 사람이라고, 잘 쓰지도 못하면서 어려운 주제를 다룬다고, 감정 과잉이라고 욕을 먹을 거에요.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자주 외친다.
“자, 욕 언제 먹을까? 응? 안나씨, 그 글로 욕 언제 먹을까요?"
" 해옥씨, 어떤 욕 먹을까요? 구체적으로 욕먹을 시기, 욕의 내용, 디테일. 한번 써 봅시다.”
학생들은 “알았어요. 알았어. 쓰면 되잖아요.” 하는 표정으로 노트북을 열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타이핑 소리를 감상한다. 여섯 날 동안, 집과 회사에서 그들의 수치심이 다시 강화된다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또 우리의 타이핑 소리로 쳐부수자, 다짐하면서 굿바이 인사를 나눈다.
완벽하게 사는 일이 불가능하듯이, 완벽하게 쓰는 일도 불가능하다. 쓰기로 한 이상, 실수와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쓴 글을 남에게 보여주면, 그 실수와 단점이 온사방에 나비처럼 날아다닐 것이다. 그렇다 해도 어쩌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단 하나의 목표는 ‘온마음을 다하는 글쓰기’일 뿐이다. 내면을 외부로 표현할 때의 그 슬프고 실망스럽고 두렵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그 취약성은 글쓰기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이 감정들은, 느껴선 안 되거나 고쳐야 할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을 말끔하게 없애고 글만 잘 쓸 수는 없다. 미안하지만, 당신이 한국여성이라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적용된다.
<대담하게 맞서기>에서 취약성에 관한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썼다.
내게 취약성은,
내 진짜 모습이 너무 실망스럽지 않기를 바라며 가면을 벗는 것이다.
용기와 두려움이 만나는 지점이다.
더 이상 속에 담아두고 참지 않는 것이다.
무서우면서도 흥분되는 것이다.
나의 전부를 쏟아붓는 것이다.
너무 두렵지만, 그러면서도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울컥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다.
박수를 기대하며, 하지만 벌거숭이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남들은 모두 옷을 입고 있는데 나만 옷이 없는 것이다.
북적대는 공항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 있는 꿈이다.
이 모든 문장은,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여성들이 내게 해준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한 글을 썼을 때, 울컥하고 두려우면서도 설렙니다.”
죽는 날까지 ‘완벽한 글’ 한 편을 쓰지 못한대도 누가 뭐라겠는가. 그저 매일 한 페이지씩을, 인생처럼 걸어간다. 어떤 날은 두려워 떨면서 어떤 날은 용기에 가득차서, 그 모든 날의 용기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고 해도, 그게 용기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서 나아갈 뿐이다.
글쓰기를 통해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이뤄내도,, 혹은 이뤄내지 못해도. 그것을 통해 나를 증명해도, 혹은 증명하지 않아도. 나날이 실력이 나아져도, 혹은 나아지지 않아도. 오늘 내가 쓰는 동안 충만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쓰는 동안 우리는 불완전하고 취약하다. 쓰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설령 그렇대도, 내가 용감하다는 사실. 내 글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내가 세계의 모든 읽고 쓰는 여성들과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브레네 브라운 <대담하게 맞서기>를 원전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