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태생인 나는 한국의 공교육에 트라우마가 있다
지난 겨울 몬트리올 여행에서의 일이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로 만난 헤더가 직업을 물었다. 보통은 작가 혹은 글쓰기 강사라는 명사로 간단히 소개하곤 하는데 그날은 여행이 준 해방감 덕인지 몇 개의 문장으로 내 직업을 표현했다. 서툰 외국어로 대화할 때는 노련한 화법을 구사하지 못하고 맨 얼굴의 나를 더 드러낸다. 그러면 오랫동안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일곱 명의 한국 여성들과 여성 작가의 글을 읽은 뒤 각자의 삶에 대해 글을 써.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오며 느낀 슬픔, 분노 혹은 우울이 소재가 되기도 해.
누군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박장대소하기도 하지.
우리는 꿈과 절망, 그 속의 유머까지를 찾아내.
모든 멤버가 자기 삶의 서술자가 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지.
사람들이 헤엄쳐 온 시간의 의미를 깨닫도록 돕는 것, 그게 내 일이야."
헤더가 조심스레 물었다.
“새 것이 아니라 불편하지 않다면, 내 책을 선물해도 될까.”
헤더는 차도르를 쓴 두 여인이 어깨를 맞댄 사진을 표지로 한 책을 가지고 왔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는 지식인 이란 여성 아자르 나피시가 쓴 책이다. 1980년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여성들에게 검은 차도르를 덮어 씌운다. 예술은 검열대에 오르고 사람들은 사소한 선택을 할 때조차 공포에 질린다. 문학의 자유는 먼 과거의 것이 된다. 교수들은 헤밍웨이 소설에서 ‘포도주’란 단어를 삭제할 방법을 찾으려 토론한다. 브론테에 대한 강의는 폐지된다. 서방의 방종한 문화를 전파한다고 여겨지는 책들은 모조리 금서 목록에 오른다.
파시즘이 횡행하는 그곳에서 아자르 나피시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결국 대학을 떠나게 된다. 교실을 빼앗겨도 수업은 계속된다. 그녀는 7명의 여학생들과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금지 도서들을 읽고 토론한다. 인간이 정치적 억압을 받는 장소에서 젊은 여성들이 최대치의 억압을 받으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엄청난 공포를 이겨낸다. 무엇으로? 읽고 생각하고 말하는 자유의 기쁨으로.
폭압의 세계에서 예술의 가치는 증폭되고 확장된다. 그들은 <롤리타>를 중년 남성의 소아성애 행각으로 읽지 않는다. 개인이 누려야할 일상의 가치를 독재주의적 시선이 어떻게 박탈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재해석한다. 7명의 여성들의 비밀스러운 읽기 모임은 문학 텍스트를 자신들이 경험하는 이란 사회에 대한 비판의 창으로 활용한다.
정확히 말하자. 나는 저들의 공포를 안다. 금지된 도서를 읽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지는 않지만, 사회에서 수용되지 않는 느낌과 생각을 가진다면 얼마나 악랄한 대우를 받게 되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다. K 정상성의 바깥에 서게 될 때, 매 순간은 투쟁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주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착실히 교육받았다.
1980년대 태생인 나는 문학 교육을 포함한 한국의 공교육에 트라우마가 있다. 내가 받은 교육을 사랑할 수도 자랑스러워할 수도 없는 나라의 국민이란 사실은 언제나 서글프고 역설적으로 자유이기도 하다. 언제고 나는 나의 교육을 부정하고 배반해서 전혀 다른 존재, 그러니까 "당신, 참 100%의 한국인이네요" 소리를 듣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것은 절망인 동시에 희망이다.
내 기억 속 국어 시간이 억압받는 테헤란과 크게 달랐을까. 자유로운 사고는 단언컨대 ‘금지’ 되었다. 텍스트에 대한 학생들의 느낌이나 생각을 질문하는 이가 없었을 뿐더러, 모두가 하나의 정답을 외워야 했다. 지나친 모의고사가 학생들의 학구열을 도리어 저해한다고 말한 학생은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쓰러질 정도로 뺨을 맞았다. 그 와중에 문학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한 아이들은 야자 시간에 참고서 사이에 스스로 고른 시집이나 소설책을 끼워넣고는 불안에 휩싸여 독서를 했다. 내가 졸업한 일산의 비평준화 고교에서는 읽기와 말하기, 생각하기를 금지했다.
80년대생인 나는 ‘정상적 문학수업’의 경험을 가지지 못했다. 문학을 오지선다형 객관식으로 가르치는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온몸이 굳어질 정도로 극기훈련 수준의 집중을 해서 최소시간 동안 최대한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을 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국가가 다루기 용이한 다음과 같은 인간형을 배출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사회의 결정권자가 미리 정해둔 정답을 고르지 못했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눈치 없이 오답을 골랐을까봐 언제나 초조해하는 사람.
그런 교육을 받다보면 보편의 한국인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정답이 아닌 것은 오답이며, 그 편협한 사고를 인생의 전반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일은 '정답이 아닐지도 모르는' 극도의 공포를 마주해야만 하는 일이 된다.
동시대의 여성이 함께 모여 말하고 듣고 쓰는 행위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사회에서는 비슷한 경제수준과 비슷한 학력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쉽다. 동류 집단을 벗어나 자신이 선택한 글쓰기 수업에서, 낯선 여성들과 어울린다. 한 편의 글을 읽고 자기 입장을 말한다.
저마다의 삶의 이력에 따라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된다. 과학을 공부하는 대학생과 무용가와 유치원 교사와 심리상담가가 각자가 지닌 다른 문화, 다른 감각, 다른 체험을 동원해 각자의 언어로 발언한다. 한 멤버는 말했다. “이토록 안전한 기분으로 나와 다른 의견들을 듣는 것. 그게 왜 제게 치유가 될까요?” 이제까지 살아온 것과 다르게 사는 여성들을 만나 다른 의견을 듣고 말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글쓰기 수업은 치유 여행 같다.
나는 언제나 '편안하게 느껴지는 생각'을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그것은 사회에서 체화한, 즉 내 것이 아닌 남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으로 살아오는 동안, 아마도 가장 안전하고 무해한 발언만을 격려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보처럼 (지나치게, 남을 공격하는 것처럼, 오만하게, 위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이라고 주저하게 되는 발언과 질문이 당신 고유의 것이라고 격려한다. 가족과 동료가 비판할지 모르는, 글로 쓰면 사이버 불링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의견이 가장 본연의 의견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고조되면 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반박해 보는 연습을 해 보자. 가령, 그것이 100%의 진심이 아니어도 좋다.”고도 말한다. 타인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것에 익숙해질 때, 나 자신도 외부의 견해를 수용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제도권 교육에서 단 한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연습이기 때문에 다들 어려워하지만 이내 즐거운 기분으로 익숙해진다.
좋고 싫음이 명확한 성격을 '무던한 회사인간'이 되기 위해 깎아내었던 나에게,
남의 의견에 맞장구 치지 않고 솔직한 의견을 말함으로서 '눈치없는 인간'이 되어 고독했던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 시간이다.
우리는 언제 쓰는 존재가 될까. 타인의 견해라는 외부 자극과 그로 인한 내부의 감응. 그 과정을 통해 각자는 글 쓰는 존재로 나아간다. 남과 다를까 봐 주저하는 마음을 기어코 극복하고 나의 오롯한 의견을 말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의견이 힘의 차이에 따른 위계에 의해 무음 처리되지 않는 경험.
누군가 “제 의견은 좀 달라요.”라는 반박 멘트로 나의 의견을 ‘있는 것’으로 대해 주었을 때, 종종 나는 “산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나.” 라는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이럴 때, 쓰고 싶어진다. 쓰게 된다.
아자르 나피시와 7명의 여학생들은 비밀 읽기 모임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희생을 감수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깨우친다. 그들은 이야기를 함께 읽고 토론하며 성장하고, 그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나아간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맞닿아 있다. 테헤란의 그들과 한국의 우리는 같다.
우리는 왜 읽을까. 왜 읽은 것을 함께 이야기할까. 우리의 일상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낸다. 읽고 말하고 기록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오래 써 온 가면을 벗고 누구와도 다른 나의 맨 얼굴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온전한 눈과 온전한 목소리, 온전한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읽기 시간은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