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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n 11. 2019

두와 서가 없는 일기

쓰는 것, 쓰지 않는 것

말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 

점 하나를 찍는 것, 언어 너머의 것  

    

마음에 대해 쓰는 일에 대해 수치심이 생겨나 버렸다. 누구도 묻지 않은 것에 대해 상세하게 쓸 필요가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 싹이 틔워버리면 답이 없다. 길은 두 갈래 뿐이니까.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 가운뎃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목록을 만들기 시작한다. 세상 모든 중요한 일이 그 핑계가 될 수 있다. 업무를 마치지도 않고 글쓰기를 하는 건 게으른 것만 같고. 그 시간에 차라리 영어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게 생산적인 것 같다. 세상에, 이렇게 수월할 수가 있나.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당신이 말해야만 합니다.”라고 권장받지 않았다고 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그 수많은 여성들이.      


임신에 대해, 육아에 대해, 여성의 일과 공부에 대해, 노년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그럼에도 신나고 특별한 노인이 되어보고 싶은 엉뚱한 기대에 대해, 매일 불안한 마음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병신같았던’ 때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담실 안은 물론 밖에서도 내내 생각하고 있다. 이십년 전에 미처 풀지 않은 문제가 있어서, 교실로 다시 돌아간 늦깍이 학생이 된 기분이다. 불행한 얼굴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된 듯한 느낌.


그래서 스스로 자랑스러운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고 그냥 문 닫고 나오고 싶다. “안녕히 계세요 다시 안 올게요.” 그 병신같았던 시절과 달리, 오늘의 나에겐 의지란 것이 생겨버려서 문제다.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해 봐야지!” 아이, 이 의지 녀석. 지금의 나에겐 용기마저 있다. “뭐가 무섭다고. 야, 그냥 들이대"


어느새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버려서 이것 참 곤란하게 됐습니다.



고통이 엄습할 때는 극도로 말을 줄인다. 하고 싶은 말은 활자가 되지 못한다. 대신 범람하는 강이 되어버린다. 넘치는 흙탕물처럼 콸콸콸, 언어 이전의 감정표현으로 흘러넘친다. 종일 눈물이 흐르는 날이 있고, 그러면 부은 눈으로 누구도 만나기 싫다고 생각한다. 


한달 전부터 기대한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지 않은 날. 


나의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는 엄마는 말했다. 

너무 힘들면 점 하나 찍어, 카톡에. 

두 개 찍고 

세 개 찍고 

막 찍어. 

그럼 엄마가 알아듣고서 너한테 더 잘해줄게.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마구 울었다. 


엄마는 그날 이후로 매일 아침 

'사랑하는 우리 딸'로 시작하는 카톡을 보낸다.


다음날엔 수박을 사서 모조리 작은 네모로 잘라 냉장할 정도로 기운을 차렸다.

그 다음날엔 향초를 피우고 프랑스어 공부를 한 시간 했다. 


친구1도 그날 울고 있었다. 1은 며칠이 지나서 "우리 다 어째 살아봐요. 콱 마!"

언젠가 내가 보낸 카톡의 답이었겠지. "생활은 의지로 하는 게 아니야. '아이 시발'하고 자리 박차고 나가는 거지. 나가서 커피라도 마셔. 그럼 괜찮아져, 조금" 

친구2는 "하늘의 구름만큼,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만큼 사랑해."라고 보냈다.



학생들이 마음에 대해 글을 써 보내면서 마지막에 하트를 붙일 때가 있다.

"마무리는 못하겠어요 (하트) 어려워요 (하트)"


백일장 내실 거 아니면, 그냥 '오늘도 어렵다' '아, 모르겠다'로 마쳐도 된다고 조언한다.

"한달 지난 후에 보세요. 해결책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그때 멋진 마무리 문장을 써도 되죠 뭐."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어도 글은 끝내라는 의미다. 


살다 보면 글 한 편을 뚝딱 마무리 할 수 있을 정도로 파이팅 넘치는 나날도 있고, 

가끔은 아주 사소한 것도 마무리를 짓지 못할 정도로 지친 나날도 있다. 

아주 가끔은  어떤 음료를 고를 지도 망설여져서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찬바람 맞으며 서있는 나날도 있다. 


멋진 마무리가 가능하면 그러면 되고

초라한 마무리가 가능하면 그러면 된다. 


희미하게 끝낼게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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