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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May 28. 2019

일기: k-효도와 가족사랑

에 대한 이런 저런 단상 

나는 한국인이 아닌 사람과 가족을 이뤄 살고 있다. 어떠한 개념은 이미 인지하고 있음에도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내게는 외국인들의 가족애가 그러하다. 아니, 너희에게는 '효도'란 개념이 아예 없다고? 


서로에게 빚지지 않은 마음이 없거나 적은 가족.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그 느낌을 100% 알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내가 대한민국 장녀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족은 이런 심리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빚을 진 마음, 그리고 그 빚을 모두 갚아야 할 것 같은 마음. 그래서 제발 더 이상은 빚을 지고 싶지 않은 마음. 하지만 그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자꾸만 주고 있는 상황. 나를 '짠하게 여기는' 가족. 그래서 가족을 만나면 이상하게 슬퍼지지만, 그 슬픔이 원래 익숙한 마음. 


가족을 '그냥 사랑'한다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일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아마 영원히 알지 못하겠지. 

어릴 적부터 효도를 교육받았다. 심지어 어린 아이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첫딸은 살림 밑천이지." 어른이 된 지금도 이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딸 팔아 돈 번다는 소리인가, 살림살이에 대한 부모의 근심을 나눠 지는 멘탈 노동을 한다는 소리인가, 모친을 도와 살림을 한다는 소리인가. (정말 모른다는 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막내보다는 장녀에게 효도는 더욱 강조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효부 노릇’을 강요받는 나의 모친을 보며 자랐다. 


가끔은 뻔히 아는 것도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다시 듣기 위해 바보처럼 들릴 질문을 던진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고, 부모님과의 여행을 즐거운 마음으로 계획하는 가족을 향해 묻는다. (그의 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가족관계가 아주 좋은 편이다)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야, 효심이야?” 

또는 “부모님과 여행할 때, 참고 견디는 거야? 진심으로 즐기고 있어?”

답은 언제나 똑같다. “매순간 즐거울 순 없겠지만,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는 걸.” 

이 대답이 환타지 같아서 한달마다 다시 묻고 있다. 

(세계의 모든 가족이 사랑하며 지낼 것이라는 생각을 누가 하겠나. 그건 너무 당연하니 디폴트로 하자) 


한국에서는 부모님과의 여행을 부르는 말이 따로 있다. ‘효도여행’이다. 효도여행에서는 가족구성원 개개인의 즐거움보다는, 부모님께 ‘봉사’한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걸어서 환장속으로’(동명의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한국의 부모만 더 몸이 아픈가? 그래서 짜증을 내나? 한국의 부모만 입맛이 까다로운가?


궁금했지만, 여러 해 생각을 거듭한 결과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뒀다.


-전세계에 존재하지만, 한국, 일본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간접화법'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함: 정신적 피로 

-자랄 때 부모가 희생했으니, 너희가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에게 효심을 보일 것이라는 교육: 2박 3일 정도는 부모의 입맛을 맞출 것 

-자녀가 어릴 때 함께 즐겁게 여행해 본 기억이 없어서 가족구성원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잘 모름 

-빨리 빨리 문화: 하루에 수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면 모두가 피로할 수 밖에...

-가성비 문화: "시장에서 사면 이거 5천원에 먹는다." "볼 거 하나두 없구만...."


뭐, 더 있겠지.


**

페미니스트가 되는 순간, 가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가부장제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했다. 나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요소가 모두 그곳에서 왔다. 가부장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진다. 분리수거해서 종량제봉투에 넣어버리고 깔끔하게 새출발하고 싶다. 비혼을 택하거나, 혹은 최소한 한국 가부장제에서 벗어나는 결혼을 하거나. 머리를 자르고 100%편안한 복장을 택하고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책과 영화, 만화를 택해 섭취하려 노력하고 일상생활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비슷한 생각을 나누는 여성들과 모임을 조직하고 견해를 나누고.


그런 하루를 보내다가, 내가 두고 온 자리의 엄마를 본다. 나의 가족이다. 

내가 나고 자란 땅에서, 뿌리채 옮겨져 다른 땅으로 옮겨가고 싶다. 거기에 엄마가 여전히 있다. 

"혹시 애를 둘 이상 낳으라고 한 거는, 그러면 도망 못 가니까? 그래서 둘 낳으라고 그랬나?"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겸연쩍게 웃는다. 모든 게 농담이라는 듯. 자기가 헛소리를 한다는 듯.

페미니즘 도서를 읽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세상의 비밀들이 있다.


"엄마, 웃어? 웃지마. 그거 맞아. 그게 시스템이야. 음모라고."

별소릴 다한다는 듯이 엄마는 창밖을 본다. 


***


가족을 버리는 것과 안고 가는 것.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에너지가 정말 많이 든다. 한국의 60대 이상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나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변화는 느리고 지난하며, 그들은 자기 기분만 표출한다. 자기가 얼마나 아프고 힘이 든지 표출+내가 너를 끔찍하게 아낌.


물론 '개지랄'(한국어 표현으로)이 가장 쉽고 빠르게 효과가 있다. 눈을 부라리고 소리를 치면 다시 개입하지 않는다. '너 나를 존중하지 않는구나'라는 반응이 올 줄 예상했지만 왠걸? 가족에게 예의없이 대하는 건 의외로 쉽게 패스되는 게 K 패밀리 컬쳐여서 놀랐다. 하지만 절대 하지 않기로.


간접화법 쓰지 말고, 문장요소 제 자리에 넣어서 오해생기지 않는 대화를 해달라는 것, 무엇을 해주기 전에 제발 물어봐 달라는 것이 내 유일한 요구다. 하지만 이 모든 요구는 투명언어. 대신 엄청난 양의 음식, 대신 청소해주기 등을 질문없이 덜컥 안겨주고, 나를 어려워하고 섭섭해 한다. 


내가 원하는 건 부모의 노동이나 물질이 아니라, 평등한 대화다. 

반찬이나 과일을 보내주는 게 아니라, 나의 일상을 물어보고 진심으로 들어주기만 하면 행복하다.


똑같은 메세지를 열 번 보내면, 언젠가 변화하리라고 믿는다. 내가 "엄마 요즘은 기분이 어때요? 우울하지는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기분이에요?"라고 마치 번역투처럼 물으면 엄마는 이런 답을 보낸다. 

"우울해." "아퍼..." 왜 우울한지 물으면 "길게 말하기 귀찮아..."라고 한다. 아, 내 친구 중 아무도 나에게 이러지 않는데, 성의껏 기분을 묻는 상대에게 덜컥 안겨주는 '날것'의 감정. 그 생생한 부담. 



언제나 지나치게 솔직한 엄마지만, 그래도 발전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일 다녀오니, 내 집 부엌 찬장 전체를 정리하고 있던 엄마를 발견하고 다시는 못하게 했던 때 생각하면 엄청나게 변화했어. 그 다음엔 한구석만 정리했고, 또 그 다음엔 하나도 하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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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그 징글징글한 효 개념, 엄마의 끔찍한 사랑. 그리고 내가 겪는 합리의 세계. 그 사이에서, 내 안의 '남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대신 안쓰러워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잘해주기' 본능을 발견한 뒤, 자기혐오를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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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가족문화: 지나치게 내어준 뒤 그만큼 오지 않으면 섭섭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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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할 에너지의 8할 들여서 가족과의 소통에 썼고, 엄마는 매우 고맥락 언어적인 방법으로 화해를 청했다. 진보라고 여긴다. 부모와의 관계는 자녀가 어른이 된 이후에는 반대방향의 양육이 되는구나


아아, 

포기하지 않는 나의 인동초같은 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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