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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Aug 06. 2019

잠옷바지 차림으로
너와 어설픈 블루스를 추고 싶어

우리가 죽는 날 밤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소글 워크숍 중 '당신에게 일주일이 남아있다면'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일주일 뒤에 죽는다. 죽음을 미리 안다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삶의 마지막 문이 언제인지 알고 스스로 닫을 수 있어서 좋다. 지난 생일에 이소라 님의 노래를 떠올렸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탄생에 있어서 부모, 성별, 시기,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 스스로 태어나고 싶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아닌가? 생전의 기억은 없으니 어쩌면 이번 생을 아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전생에 매미였다면 어땠을까. 7년 동안 내내 땅속에서 빛 볼 날만 기다리다가, 딱 한 번의 여름에 짝을 찾다 뜨겁게 죽는 매미. 죽음의 세계에서 만난 생명의 신께 맴맴- 두 날개를 열심히 비비며, “적어도 60번 이상 여름을 맞을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제발.” 애원했을지도 모른다. 

 

태초의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간의 자각 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죽는 날짜를 미리 안다는 것은 자의식이 한껏 고무되는 일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서 기쁘다. 


사과나무나 복숭아나무 밑에 묻히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다. 사과는 사각거리는 식감을 사랑한다. 복숭아는 향기에 반했다. 시골에 내려가서 살아볼껄. 직접 키워보지 않아서 식생과 꽃의 향기를 알 수가 없다. 먹어본 기억밖에 없어서 아쉽다. 봄에 새싹 돋고, 꽃 피우고, 열매 맺기까지 과정을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것들의 매력을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다음생에는 과수원 농부로 태어나자. 아니면 나무 아래에서 모든걸 지켜볼 수 있는 흙으로 환생하자.

화르르 한순간에 육신을 분해하는 화장을 원한다. 도자기가 아닌 자연 안에서 쉽게 거름이 되는 나무 함에 담아주길 바란다. 밝은 색감의 자작나무, 편백, 삼나무는 피하고. 너무 화려한 결을 가진 아카시아말고. 은은한 밤색이 나는 멀바우가 좋겠다. 오일이나 바니쉬같은 목재를 길게 살게 하는 마감재는 피하길 바란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내가 직접 깎아서 함을 만들고 싶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참 깍쟁이 같네. 죽음을 준비하며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여유는 챙기지 못하겠다.   


죽음의 세계로 입장할 때, 장롱 속에 걸려있는 하얀색 긴 팔 원피스를 입고 싶다. 양가 어른들 모시고 결혼하기 전에 친구들만 모아놓고 파티를 했었지. 우리 둘의 시작을 알리는 파티여서 ‘시작 파티'라고 이름 지었었다. 창덕궁 뒷길을 돌며 웨딩 스냅 사진을 찍을 때도 이 원피스를 입었었어. 그리고 결혼기념일 아침마다 이 옷을 입고 우리 집 거실에서 정대와 기념촬영을 했었다. 추억이 많은 옷이다. 행복한 기억을 곱게 걸치고 떠나고 싶다. 끝까지 긍정성을 잃지 않겠다.


내가 숨을 거둔 모습을 정대만 봤으면 좋겠다. 꿈꾸는 그의 얼굴을 향해 옆으로 누워 스르르 잠들듯이 죽고 싶다. 매일 밤 인간이 잠드는 것은 작은 죽음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라는 글을 본 적 있다. 30년이 넘게 작은 죽음을 연습했으니, 실전에 쓸 기회를 달라. 


아침에 일어나 내 모습을 본 정대는 한참 울 것이다.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싶다. 염은 하지 않길 바란다. 누군가에 맡겨져 평소와 다른 스타일로 알록달록 화장한 얼굴로 누워있는 모습은 자연스럽지 않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을 가족들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 정대는 매일 같은 이불 안에서 일어나니까 아침마다 자는 내 얼굴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자는 얼굴과 죽은 얼굴이 크게 다르지 않길 바란다. 고요하게 슬퍼하는 정대의 품에 한참 안겨있다가 조용히 화장터로 가고 싶다. 관은 어차피 금방 타버릴 테니까 제일 저렴한 원목으로 부탁한다. 아무거나 상관없다. 합성소재여서 쾌쾌한 매연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는 날 밤에는 정대와 춤을 출 것이다. 매해 마지막 11시 59분에서 12시 사이, 그해 가장 좋아했던 발라드를 함께 들었다. 잠옷 바지 차림으로 둘이 꼭 껴안고 어설픈 블루스를 추며 새해를 맞았다. 작년에는 ‘자이언티의 눈’, 올해는 ‘이소라의 남자친구’를 들으며 깊은 포옹을 했었다. 나의 마지막 날에는 ‘백예린의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를 듣고 싶다. 비트가 신난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불안한 마음은 어디에서 태어나

우리에게까지 온 건지

나도 모르는 새에 피어나

우리 사이에 큰 상처로 자라도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해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눈을 맞춰야 해

가끔은 너무 익숙해져 버린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사처럼 마지막까지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린 손을 잡아야 한다.


장례식은 하지 않겠다. 죽는 날짜를 알 수 있어 좋은 게 무엇이겠는가. 친구들과 미리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 SNS에 안녕의 글을 쓰고 싶다. 멀리 있는 친구들과는 만날 시간이 없을 거 같으니까. 그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건강과 행복을 기원할 것이다. 죽어가는 영혼은 맑은 기운을 가질 것이라 믿는다. 친구들을 향한 내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만나서 인사를 전하는 것이 좋겠지. 눈물바다가 될 것이다. 실컷 울어도 좋을 거 같다. 이 순간만큼은 눈물의 정화 기능을 믿는다. 마음껏 슬퍼하자. 우리. 정말 안녕이니까. 가족과 꼬옥 껴안고 마음이 닿게 한 적이 있었던가. 가장 가까운 사이라 여겨 무심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직접 만나서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자. 

정리하고 싶은 물건들은 많지 않다. 속옷들을 미리 다 버리고 싶다.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제일 측은해 보일 거 같은 물건이다. 속옷은 왜 쉽게 후줄근해 지는가! 한 4년 전부터 책을 읽으며 좋았던 구절을 만년필로 적은 필사 노트가 있다. 내 손글씨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큰 조카 연화에게 주고 싶다.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때, 어느 장이라도 펼쳐 읽으면 위로가 될 것이다. 나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받아 적은 구절들이니까.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그림도구는 작은 조카 연우에게 주길 바란다. 마카, 색연필, 오일 파스텔, 도화지. 그리겠다 욕심 내놓고 쟁여놓은 재료가 많다. 속마음을 잘 감추는 연우가 그림으로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며 당차게 크길 바란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이 궁금하다. 죽음을 코 앞에 두었는데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하다. 어쩌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저 너머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좀 피곤한가. 이제 존재함을 그만두고 싶을 수도 있다. 


내 삶의 여러 부분은 궁금증으로 시작되었다. 첫 직장이었던  IT회사에서 손으로 직접 만들며 사는 삶은 어떨까 궁금해서 작은 가구 공방으로 점프했고, 얘랑 사귀어보면 어떨까 궁금해서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고, 그림 그리며 늙어가는 인생은 어떨까 궁금해서 그림책 작가를 꿈꿨다. 호기심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늘 하던 대로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가뿐하게. 나는 간다.  







by 꼼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고 글을 씁니다. 소글워크숍을 수강하고 있어요. 그림책을 쓰고 그리는 할머니가 될 것이에요. 


소글매거진

소글워크숍 중에 초고를 쓴 뒤 발전시켜 완성한, 수강생들의 원고를 싣고 있습니다. 

여성전용 글쓰기 클래스 '소글워크숍' 카카오플러스친구 

http://pf.kakao.com/_xaMK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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