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은성 Aug 21. 2019

흑점이 된 이카루스들

관성처럼 너의 이름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흰 털이 빛나는 고양이는 선아의 애인이 데려온 아이다. 이른 아침 애인이 출근한 뒤 작은방에 고양이와 덩그러니 남아 있을 때면 알 수 없는 적막이 둘 사이를 떠다닌다. 바다와 호박을 담은 눈으로 이 적막 속을 헤집는 고양이의 이름은 산호다. 산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핑크색 귀를 두번 펄럭거리는데, 선아는 그 움직임이 좋아 산호를 자주 부르곤 한다. 


그러다 가끔 지금처럼 선아의 목구멍 가득 다른 이름이 차올라 산호를 발음할 수 없게되는 순간이 있다. 그 때는 꼭 개구리들의 부푼 목처럼 토해내지 못한 이름으로 목 안이 잔뜩 부푼 느낌이 들곤 한다. 선아는 이 서늘한 순간을 항상 슬픔으로 맞이하며 비통함으로 끝맺는다.


가시를 뱉어내듯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 선아는 자리를 뜬다. 산호의 눈길이 선아의 입술에 붙었다 떨어진다. 선아는 큰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눕는다. 하얀 LED전등이 햇빛 대신 방안을 밝힌다. 선아와 애인이 이사를 온 지 4개월 정도가 지났다. 전등은 집을 이사오는 날 모두 새 것으로 교체한 것이라 햇수로 세어본다면 선아와 거의 동시에 집에 박히게 된 셈이다. 


선아는 아직 슬픔이 진행중인 목을 가만히 만져보며 전등을 응시한다. 하얀 전등에 검은 점이 하나 둘 셋 넷, 이름모를 벌레가 출구를 잃고 벌써 네마리나 죽어있었다. 한달에 한 번 꼴로 이 집은 죽음을 맞이했지만 아무도 상을 치르지 않았다. LED 태양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든 저 네마리 이카루스들의 죽음은 이제야 발견되었다. 발견되지 못한 죽음들도 이 집안 곳곳에 남아있겠지. 


이 집은 얼마나 많은 죽음을 목도했을까, 선아는 문득 궁금해졌고 지금 선아의 통증을 유발하는 부를 수 없는 그 이름의 죽음에 대해 조금이나마 초연해 보도록 노력하기 시작했다. 선아와 몇 가족들을 제외한 수 많은 사람들에겐 전등 속 벌레처럼 발견되지 않는 그 죽음에 대해.


선아가 개인적 죽음을 보편적 죽음으로 이행시키며 슬픔에서 떨어지려 할 때 문득 죄책감이란게 떠올라 다시 쪼그라든 목 안을 부풀렸다. 순간 목울대가 따끔 거리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통증은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담은 목에서 시작 되었는데, 이상하게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왔다. 선아는 비도 오지 않는 봄날에 목청껏 개굴거렸다. 비통에 젖어 우는 와중에도 선아는 생각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가져오는 슬픔은 이기적인 속성을 가져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받아서는 안된다고. 그것은 선아가 부를 수 없는 이름의 죽음을 떠올릴 때 보다, 그 이후에 밀려오는 죄책감에서 눈물이 터졌을 때 이미 정해진 값이었다.


선아의 검은 강아지가 죽었을 때, 그의 이름도 선아의 입에서 부서져 주인을 잃었다. 가끔 애인의 고양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를 때 관성처럼 그 이름이 튀어나오려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과녁 잃은 이름은 흔한 궤적 하나 그리지 못하고 입 안에서 머물다 사라진다. 그 부서진 잔해가 이와 잇몸 사이에 알알이 박혀 떫은 맛을 내는데 선아는 그 맛을 죄의식이라고 부르곤 했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지나 베갯잇을 적신다. 또 몇 줄기는 길을 잘못 들어 귓구멍에 고이기도 했다. 선아는 오른팔을 들어 눈물을 훔치고 왼 손으론 아직 떨고있는 목을 진정시켰다. 아직 입 안 가득 으개진 녹찻잎의 떫은 맛이 가득했지만 울음을 멈추려 노력했다. 혹여 눈물이 면죄의 매개가 되는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선아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필멸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단 한가지 불멸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선아의 죄책감이라 생각했다. 그 크고 단단한 덩어리가 선아의 눈물에 부식되어 조금이라도 사라지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한다. 눈물이란 것엔 이상한 힘이 있어, 타인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고 더 나아가선 스스로를 위로하고 만다. 그 힘이 세월과 만나 몸 안 가득 고이기 시작하면 어느새 죄책감에까지 스며들게 되는데, 이후엔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죄책감도 조금씩 녹아 흘러 사라진다.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거라는 말은 잊혀지는 것에겐 얼마나 무정한 말인가. 


흐느낌이 조금 잦아들 무렵 산호가 작은방에서 나와 문지방에 기대 선아를 바라보고 있다. 애인이 데려온 길고 하얀 고양이. 검은 강아지의 죽음으로 만날 수 있었던 수 많은 만남들. 선아는 가끔 좋은 인연이라 생각이 들 때,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거슬러 생각해보는 버릇이 있다. 


관계에 너무 몰두하지 않기 위해 생긴 습관중에 하나인데, 이걸 점철들에서 점이 되어보기라고 부른다. 점철들. 수많은 사건의 점들이 각기 점철되고 연쇄적으로 또 다른 점철들을 만들어 내야 비로소 지금을 설명할 수 있다. 저 작고 하얀 고양이는 애인이 없었으면 만나지 못했지. 애인은 친구의 부탁으로 가기 싫었던 축제에 이끌려 간 덕에 만날 수 있었어. 그 친구는 불어를 배워보겠다고 이리저리 알아보다 스터디 모임에 나갔을 때 만나게 됐었지. 불어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건 밀란쿤데라의 책을 도서관에서 읽고 나서 였어. 만약 서울에 오지 않았다면 그 도서관에 갈 일은 없었겠지. 서울에 적은 돈으로도 올 수 있었던 건 책임질 만한 무언가가 없이 혼자여서 가능했겠지. 


그래. 책임이 없어서 가능했었지. 선아의 작고 검은 그 책임. 좋은 인연들이 불행과 행운의 가면을 번갈아 쓰며 아슬아슬한 운명적 점으로 연결지어진다. 그러나 언제 어떤 지금에서든 시간을 돌리면 종착지는 늘 검은 강아지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 이전의 삶들은 생각할 수가 없다. 작은 죽음을 담은 점의 크기는 너무 커서 관망하는 것 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아의 지금은 그 죽음안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면 만날 수 없던 이 만남들을, 부재가 빚어낸 만남을 좋은 인연이라 칭할 수 있을까. 상실감을 등에 업고 지나온 지금을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까.


선아가 울음을 멈추고 이윽고 산호가 울기 시작했다. 아마도 배가 고파 그런 것이라 생각이 들어 시간을 확인 해 보니 밥 때가 한참이나 지났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고양이가 있는 문지방을 넘어 주방 찬장을 열었다. 공기를 막기 위해 단단하게 조여진 파란 사료봉투가 눈에 들어온다. 봉투를 열자마자 공기와 만난 사료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굴러다닌다. 


고양이의 울음과 사료 굴러다니는 소리, 선아가 떠난 큰 방에 태양의 흑점이 되어버린 이카루스들의 날개 타는 소리가 고약하게 울려퍼지는 어느날이었다.




by장민아 


소글매거진

소글워크숍 중에 초고를 쓴 뒤 발전시켜 완성한, 수강생들의 원고를 싣고 있습니다. 

여성전용 글쓰기 클래스 '소글워크숍' 카카오플러스친구 

http://pf.kakao.com/_xaMKLC

매거진의 이전글 잠옷바지 차림으로 너와 어설픈 블루스를 추고 싶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