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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Sep 11. 2019

계속해보겠습니다

2019년 9월 10일 여성작업실 씀씀의 문을 닫았습니다 

상상 속에서 여러 차례 했었기 때문에 이미 그것을 했다고 착각해 버리는 일들이 있다. 언제나 '생각이 많다'는 평을 듣는 인물들에게 흔한 습관일지도. 설레고 가슴 아픈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아주 다채로운 방식으로 했다. 상대가 기억조차 못할 사건에 대해, 길고 자세한 문장으로 내게 당장 사과하라고 가족에게 요구했다. 하지 않았다. 겁이 나서일 것이다.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씀씀작업실에 대해서도 몇 편의 글을 썼다. 인생의 아주 중요한 것들에 대해 항상 그런 태도를 취했듯, 아마도 상상 속에서 했겠지.


2019년 9월 10일, 씀씀작업실의 문을 닫았다. 4년 전, 남미여행을 함께 한 단짝 친구들로 시작했던 작업실 멤버들은 결혼이며 이직으로 이미 하나 둘 떠났다. 작업실 주인 아미, 그리고 그녀의 동네친구로서 애초에 “내가 여기 껴도 되나” 싶은 기분으로 책상 하나를 점했던 의외의 멤버인 내가 둘이 남았다. 작년 여름께, 씀씀작업실은 더 많은 여자친구들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 일련의 사건으로 마음이 피로해져 여행을 떠나는 아미와 이메일로 아무렇게나 꿈을 말했다. 동네의 여성들이 주황색 방에 들어와 편하게 차 마시며 책읽다 가면 좋겠다, 우리 책을 한방에 다 모아두자! 서로 격려하고 공감하는 여자 모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혼자 쓰면 외로우니까! 나는 마포구청 강당에서 공짜로 글쓰기 강의하고 싶어, 다들 누워서 들었으면 좋겠어!


다시 말개진 얼굴로 서울로 돌아온 아미와 이런저런 모임을 시작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여자 친구들과 모여서 글을 쓰고 술과 밥을 먹으며 또 한 차례의 찬란한 시간을 보냈다. 장기간의 세계 여행과 유럽으로의 이주를 하게 된 우리 둘은 이제 작업실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모레와 어제 냉장고며 전자렌지, 세탁기 등이 모두 수거됐다. 책상들이 빼곡했던 방에는 비닐봉지나 포장용 테이프 심이 뒹굴었다. 조용한 폐허에서 아미, 현아와 어깨를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난데없는 폭우가 쏟아져 울 틈이 없었다. 9월 11일 아침에는 착각을 했다. 작업실 근처에 볼일이 있으니 아침 일찍 가서 작업을 좀 하다 가야겠다고, 잠에 취한 채로 계획을 세웠다. 이제 계획은 다른 곳에서 세워야 하고 나는 이제 '졸업'을 했는데...어쩌나...커피를 만들다 랩탑을 켰다. 




씀씀작업실은 내가 평생 원했던 학교 같았다. 한 번도 다녀 본 적 없지만 나는 언제나 씀씀같은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안으로 자랄 수 있는 장소. 아무런 계획표 없이 휘적휘적 가도 친구를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 무엇이 되라고 강요받는 대신 무엇을 원하냐고 물어봐주는 장소. 목표를 유예할 수 있는 장소. 유예하는 시간 동안엔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낙서하며 나를 직면할 수 있는 장소.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희귀한 학교. 


함께 공부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떠들고 누군가 사람이나 꿈과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힘껏 응원해 주고, 지각을 하면 2교시에 가면 되지, 누구도 지각이나 결석에 대해 탓하지 않고. 밤새 울어서 얼굴이 온통 부어도 “라면 먹고 잤냐”고, 우느라 연신 코를 풀면 “00이 비염인가 봐.”하는 무심한 소리. 옥상에 누워 고독해하다가 돌아가 교실 문 앞에 서면 터져나올 듯한 소란에 안도를 느끼고. 


아, 이 싫은 사람 흉보러 씀씀에 가야겠다. 아, 이 지겨운 기분 말하러 씀씀에 가야겠다. 그러면,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네가 아닌 그것이 나쁘다고, 네가 옳다고 해서 내가 왜 옳으냐고 물으면 아 너 되게 똑똑하잖아, 라고 논리가 하나도 없는 따뜻함으로 지지해 주겠지. 사소한 디테일이 틀려서 내 이야기 제대로 들었냐 따지면 저 쪽에서 "언니들, 부침개 먹어라.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전 식어!" 외치는 소리. 들려오고.


애초에 잃어버린 학교를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모두를 환영했고 언제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처음 이 공간을 만들기로 결의한 아미와 혜선과 산하에게 깊이 감사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 


 유진이 종종 홍차를 들고 올라가 하늘 보며 쉬던, 현아와 안나가 밤새워 술을 마시고 해돋이를 보던 씀씀 옥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서


돌이켜 보면 서울은 언제나 긴장, 이었는데. 내가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라고 몰아붙이는 그 긴장,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깨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자칫하면 사람은 자신이 머무는 곳의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거나 혹은 그것을 너무 미워해서 나조차 미워하게 되니까. 문 밖에 나가면 여성 혐오 발언을 하는 개그맨이 쉼 없이 텔레비전에 나오고, 온몸을 뜯어고쳐 리얼돌과 비슷한 모양의 신체를 만들라는 광고가 전철 차량마다 붙어있고. 어린 여자애들이 허리를 꼬며 춤을 추면 어른들이 예쁘다고 장난감 사라며 지폐를 주는 그런 세상에서, 사라져서, 숨어들 수 있는 곳이었다. 씀씀 문을 열 때마다, '바깥에선 내가 긴장하고 있구나' 깨달았다. 


씀씀작업실의 큰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더 이상 턱이 아프지 않았다. 그 평온함. 가끔은 '저녁에 뭐 먹지' 라는 생각만 하기도 했다. 분노나 자기혐오가 작업실 마루의 공기에 녹아들어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편하다.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낄 때마다 또 눈물이 나곤 했다. 아찔해. 평생 집도 학교도 없었던 기분으로 살 뻔 했네, 하면서 너구리나 끓이러 갔다. 


소설, 에세이, 넷플릭스 리뷰, 시나리오, 자서전, 일기. 여자들과 함께 글을 쓰며 각자의 일상과 소망을 나눴다. 



학교에선 여러 가지를 해낸다. 실패해도 괜찮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서 가장 많이 변했어”라는 말을 듣는 멤버로서, 쑥스럽지만 복기해 보기로 한다. 평생 해도 지겹지 않을 만큼 좋아하는 직업을 찾았고, 나와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한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내밀한 글감을 쓰려면 반드시 고독해야만 하는 인간이었다가 지금은, 옆에서 북과 장구를 치며 막걸리를 마시는 난리판이 벌어져도, 일기도 논문도 쓸 수 있을 만큼 무던한 인간이 됐다(고 믿는다) 


누구도 나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와, 누구나 나를 지지해 줄 것이라는 든든함. 그런 기분에 등 떠밀려서, 내가 원하는 방식의 글쓰기 수업을 혼자서 열었다. 여자친구들과 수요일마다 함께한 ‘5분 글쓰기 스터디’가 계기였다. sns로 글쓰고 싶어하는 여자들을 모집해 연 화요씀씀, 토요씀씀이 내 상사이자 동료가 되어주어서 전혀 외롭거나 힘들지 않았다. 


글쓰기 모임에서 주제도 분량도 없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sf적 상상으로 끄적이다 보니 미친 듯이 즐거워졌기에, 그 기분을 나누고 싶어졌다. 


화요씀씀 토요씀씀의 모두의 글이 흥미로웠는데, 서로를 질투하지 않고 사랑했다. 기분이 좋은 누군가가 그날 기분이 좋지 않은 다른 멤버를 도울 수 있는 상태였다. 어떤 순진하고 과장된 이야기도 받아들여졌다. 


어린 아이를 가족에게 맡기고 1리터 오렌지 주스를 들고 와 마시며 순식간에 예술가로 변모하던 보배와 다정한 맏언니처럼 언제나 귀하고 맛있는 간식을 사 오고 멤버들을 챙기던 성혜가 모임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섬세한 문학적 영혼을 지녔으나 경멸과 조소로 가득한 제도권 창작 강의에 마음을 다친 백이 종종 울 때면, 덩달아 마음이 아프곤 했다. 이미 훌륭한 작가이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안나와 민해와 그리고 여러 명의 여자 친구들이 놀라운 속도로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썼다. 


매주 모여서 여행과 가족과 일과 몸과 꿈에 대해 우리는 쓰고 말했다. 어떤 거장의 글보다, 서로의 글이 더 재미있었다.


야, 세상이 이렇게 신나는 거였냐! 모르고 살 뻔 했네. 글쓰기는 행복한 일이구나. 자유로워지는 일이구나. 




가끔 "열쇠 고쳐요." "양파가 오천원" 소리가 들려오던 씀씀 창문. 창틀 무늬를 정말 좋아했다. 


마루엔 열 명이 앉을 수 있는 넓고 단단한 테이블이 있었으므로, 굳이 공간을 찾는 어려움 없이 소글워크숍을 가볍게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평소에 내가 너무 진지하고 음울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하면 (정말 민망할 정도로) 여자친구들이 깔, 깔, 깔 웃으며 “뭔소리야. 언니는 희극인이야. 언니보다 웃긴 사람 주변에 있어?” “나는 친구가 별로 없어서 주변에 나보다 웃긴 사람이 없는데.” 어쨌거나, 용기가 났다. 


자, 희극인이라면 쇼를 해야지? 매일 저녁, 스탠딩 코미디 쇼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여자들과 글쓰기 수업을 했다. 


하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 가르치기를 모두 좋아했던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직업이란 것을 깨달아서 몸서리쳐지게 기뻤다. 모든 것이 씀씀 덕택이다. 저녁 시간마다 마루에 소리를 가득 채우는 것이 작업실 멤버들에게 매번 미안했지만. 아니야,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옥상에서 영화를 틀려고 할 때마다 비가 오곤 했지.


많은 것을 해냈다. 어떻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건 큰 계획이 아니고 즐거운 분위기로 으쌰으쌰, 조그맣게, 그냥 한번 해 보는 것이란 걸 알았다. 망해도 아무도 모르게, 작게 한다는 마음으로 그냥 하면 다 되곤 했다. 마법 같았다.


우리는 책도 출간하고 스토리펀딩도 하고 독립출판도 하고 옥상 마켓도 열고 여행자 파티도 하고 쓰기 모임도 하고 수업도 열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 어떻게? 누군가 도와줄 것 같은 이상한 믿음으로 그냥 해버렸다. 시무룩하게 걱정하고 있으면, 다른 멤버가 또다른 걱정을 하고 있기에, 아유 제가 그 책 사드릴게요, 소문낼게요, 하고 말하다 보면 그 말이 부메랑처럼 나에게 꽂히곤 했다. 다들 도와줄거야.


참, 결혼도 했구나. 잊을 뻔 했네. 


“아는 여자가 키워야죠” 하는 대구남자와 “저는 무조건! 행복한 결말이 있는 영화만 봅니다.” 는 제주남자와 소개팅한 이야기를 깔, 깔, 깔 들어준 여자친구들 덕에, 아 이건 코미디구나, 깨달아 벼락치기로 영어를 배우고 외국인 파트너를 만났다. 영어 과외도 씀씀 테이블에서 했다. 씀씀에선 내 영어발음이 울려퍼져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 엉망진창 ‘마포구 합정동’ 액센트로 아미, 혜선, 산하와 B 사이를 통역하며 전주에서 막걸리도 몇 주전자 마셨다. “그런데 바티, 머리 파마한 거예요?” 


프랑스인의 고수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선이 정말 중요한 질문이라는 듯 물었다. 긴장이 풀려서, 또 함께 깔, 깔, 깔 웃었다. 나의 지적이고 상식적이고 예의바르고 친절하며 다정한 여자친구들이 ‘보편의 한국인’이라고 착각한 B는 한동안 한국에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하고, 고양이하고. 


씀씀 친구들 모두의 힘으로 스토리펀딩에 성공하기도 하고. 그림은 B가. 


누군가는 '행복했다'고 말했지만, 나에겐 자유로움이 더 가까운 감각이다. 내 글이 언제나 그렇듯 또 한껏 길어졌고, 주책을 떠는 것 같고, 친구들의 모든 의미를 아우르지 못하고 또 나에 대한 글이 된 것 같아 언제나 그렇듯 기분이 좋지 않아지려다가도 길고 장황하고 나만 아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주고 그것이 재밌고 웃기고 신나는 것이란 사실을 알려준 친구들 덕에, 나다울 수 있게 되었다. 


글을 도대체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감상적이 되어도, 남보다 많이 울고 많이 웃는 건 죄가 아니라 축복인데 왜 몰랐냐고 말해 준 친구들 덕에 "에라 모르겠다. 내가 낸데 뭘! 유럽에서도 힘들면 많이 울지 뭐." 마음 먹을 수 있게 돼 이주 계획을 짜고 있다. 졸업을 했으니, 세상으로 날아가야지. 


승연 언니의 딸 미루가 만들어 준 씀씀작업실 레고. 테이블 위 수북한 종이들 :) 




하지만, 계속하겠습니다. 

학교의 배움을 마음에 지니고 살아가는 수많은 행운의 사람들처럼, 되었다는 고마움을 품고.

모든 것을 기억하고서 


* 그때의 빛나는 머리칼들과

그때의 빛나는 이빨들과 

그때의 빛나던 단어들과

그때의 기억나던 손짓들과 

그때를 비추던 거울들과

그때와 똑같은 습관


일어나자마자 나지막이 불러보았던 몇 개의 이름들*


을 배낭에 담고서, 걸어보겠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 이랑 <신의 놀이> 94페이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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