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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없는 기분

서울일기: 20191022 화요일

by 소은성

작년에도 했고 지난주에도 했고 오늘도 한 말이 있다. ‘쓰고 싶은 게 없는데?’ 이유는 많다. 책 한 권을 쓰느라 탈진했다는 것은 최고의 핑계다. 자주 쓸 수가 없다. 요즈음 재미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도 괜찮다. 오늘은 두 가지를 모두 사용했다. 그렇다면, 할 말은 많은가? 오늘은 할 말을 해보도록 하자.


글쓰기 자아가 무기력함을 호소할 때는 뭔가 흉볼 거리를 찾는 게 가장 쉽고 빠른 해결책이 된다. 어제는 뭘했더라? 횟집에서 방어 반 연어 반을 먹으며 ‘한국인 아저씨와 중국인 아저씨 중 반드시 한 명을 룸메이트로 선택해야 한다면?’을 묻고 답했다. 상대의 답변은 숙고 끝에 ‘한국인 아저씨’로 결정됐다. 10분 단위로 그르르륵 칵 퉤 그르륵 튀를 반복하고 취하면 길에 쉬도 하고 찌개를 먹을 땐 후루루루루룩 쩝쩝쩝쩝쩝쩝쩝쩝쩝쩝쩝쩝을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잘 씻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오늘은 정말 무기력한가보다. 싫은 것을 써보아도 기력이 없다.


어제는 몇 년 만에 아는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나 캘리충 됐어’라고 했다. 일년 간 캘리포니아에서 공부 겸 휴가 겸 지낸 언니는 얼굴톤이 아예 변해있었다. 언니, 캘리톤 됐어요. 이마와 눈과 양볼이 모두 캘리톤이었다.

싫고 화나는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친구들이 잔뜩 생겨서 행복해져버려서, 이 땅을 두고 떠나는 게 몹시 아쉽다고 했더니, 언니는


떠나지 않고 이곳에서 계속 비판만 하다 늙을 순 없잖아,


라고 말했다. 진지한 조언과 깊은 충고도 아니고 자동답변된 것이었지만,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단 1프로라도 저곳보다 이곳이 좋으면 이곳을 택하는 거지. 정말 케바케야. 뭐가 더 낫다고 할수 없어, 라고도 했다.


이또한 자동답변이었지만,

굉장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이런 기분이 들었다.


아, 무슨 고민을 해, 답 안 나오는 걸. 생각 버튼 끄고 잘 놀고 잘 먹고 잘 쉬는 게 대-박.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는 건 너무나 좋다.

아! 그래서 글 쓰고 싶은 게 없구나.



요즘은 화가 나면 상대를 찾아가서 풀어보는 게 글로 쓰고 정리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고,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서 만날 수 없는 (예컨대 설리에게 악플다는) 인간은 내 소중한 뇌에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참혹한 것은 너무 참혹해서 글로 다루기가 어렵다.


말하기와 글쓰기가 다 무용하다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ps

날짜를 쓰다 깨달았는데 오늘은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지 40년째 되는 날이다.

순간의 선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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