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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

20191015 서울일기

by 소은성

1 아득바득. 어딜 대들어. 이를 악물고 참았어. 아주 그냥 작살을 내줘야지. 아작을 내줘야지. 혼구녕을 내줘야지. 사는 게 불쌍해서. 보자보자 했더니. 나를 우습게 알고. 그년이 나를 이겨먹으려고. 호락호락할 줄 알아?

악몽처럼 계속 틈입하는 소리들이 있다. 어제는 시내 대형 카페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한이 맺힌 악다구니. 말의 내용이 아니라 표정과 목소리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안간힘.


커피잔을 들고 다른 자리로 도망쳤지만, 그 악다구니는 귓바퀴로 들어왔다. 프랜차이즈 매장 관리 직원인지 스마트폰 판매 직원인지 모를 상대편은 그 악다구니에 정보값 없는 대사를 그저 주억거렸다.

“어머니, 처음에 저희가 드린 말씀은 그게 아니구요. 저희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구요.”


여자는 자신이 우습냐고, 만만하느냐고, 어디 선량한 사람 등골을 빼먹으려 하느냐고 소리를 질러댔다.


카페 안에 소리가 울렸지만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누가 옳고 그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런 악다구니를 몹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이었다. 그저 곁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불안을 느낀다. 고층 빌딩이 무너질 것 같고 대교가 중간에서 부러질 것 같다.


2 처음에는 동족 혐오라고 생각했다. 내가 저들처럼 ‘악에 받친 상태’가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저들처럼 쉽게 악에 받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부는 아니다.



3 항상 한에 쌓여있고 그 한을 풀어야 한다는 걸 명분으로 움직이는 상태에 익숙해지기 쉬운 환경이라는 트윗을 보았다. 일터에서 모멸감을 얻고, 자식에게 희생하고, 가족관계에서 서열이 생기는 사회. 그 바깥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왜 그렇게 살아? 또는 그들을 ‘나이브하다’고 말한다.


4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주저앉힐 수 있나. 계속해서 물어보는 분위기를 조성하면 된다. 불안하게 만들면 된다.


5 한번이라도 벽을 뛰어넘어 본 사람들은 안다. 벽 바깥의 세계에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나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고 믿었던 세계로는, 절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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