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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Oct 23. 2019

정말 미워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

용기를 내어 제대로 미워하지 않는다면, 감정은 애꿎은 방향을 향한다

나는 피곤했지만 무척 신이나 있었다. 제주도였고, 좋은 숙소를 잘 찾았다는 뿌듯함이 있었고, 귀찮은 술자리에서 일찍 빠져나온 대신 제법 그럴듯한 핑거푸드를 만들어 식탁에 예쁘게 올려두었다. 그날 숙소에 먼저 들어온 사람들의 면면은 평소라면 만들어지기 힘든 조합이었는데, 이런저런 메뉴를 구상하며 전에 없이 즐겁고 다정한 분위기로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술에 어지간히 취해 바리바리 장 본 것을 든 선후배들을 앞세워 들어온 그가 


“만두 좀 구워 와봐라”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장에 화가 났다. 일단 언제나 그렇듯이 장을 잔뜩 봐 왔는데, 숙소에 이미 먹을 것과 술은 충분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 숙소에서 머무는 것은 그날이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 아침에 남은 음식들을 추스르는 것은 결국 나와 내 후배들이 될 것이다. 게다가 함께 들어온 선배와 후배들은 공히 취해있었고, 주위의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댔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화가 났던 건, ‘만두 좀 구워와 보라’는 말에 나와 핑거푸드를 재미나게 만들었던 수진선배가 재빠르게 만두를 가져와 팬에 기름을 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만두를 원한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그녀는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 조금 전 나와 핑거푸드를 만들며 동료애를 쌓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도 선배들이 감독님 말에 아무 토를 달지 않고 따라서 후배들까지 덩달아 따라야 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이 맘에 안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때 내가 “그럼 감독님이 구워 드세요”라고 말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 하고 방울토마토가 예쁘게 놓인 식탁 앞에 털썩 앉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가 ‘그래’하고 일어나 만두를 구웠을까. 그 이후 상황은 감독의 그때 기분 상태에 따라 달라졌겠지만 일어나서 만두를 구웠을 확률은 아마 10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기분이 조금 나았다면 나는 되바라진 애로 테이블 위 안주거리가 되었을 것이고, 기분이 안 좋았다면 그가 삐져서 ‘그럼 먹지마’ 했으려나. 


그렇지만 누군가는 만두를 구웠을 것이다. 만두는 식탁에서 차갑게 식어갔을 테고. 그럼에도 ‘만두를 구워 오라’고 했던 사람보다 바로 만두를 구워 대령했던 선배에게 화가 났다고 기억하는 이유가 뭘까. 


선배들에 대한 불만은 대체로 후배들에게 제대로 된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데서 야기됐다. 방어막이 되기는커녕 바보같이 굴어서 내가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던 적도 있었고, 나를 예민한 사람처럼 얘기할 때 그 분위기에 동조해서 우스개로 소비하거나, 갈등 상황에서는 아무 태도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능하고 수동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애초에 싫은 소리를 한 사람도 감독이고, 나를 예민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도 그였다. 그런데 나는 선배들까지 왜 그렇게 미워하게 됐을까. 항상 그도 싫지만 선배들도 싫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사실 감독이 아니었다면 선배들을 싫어하게 될 이유도 없었던 것 아닐까.  


 ‘니가 구워 드세요’라고 말하지 못한 과거의 나에게 화가 나는 것과, 감독의 말이라면 토 하나 달지 못하는 선배들에게 화가 나는 것은 같은 것일지 모른다. 방울토마토 카나페를 만들며 즐거움과 동료애를 느끼는 것이 분노를 느끼는 것 보다 더 중요하고 모두에게 좋은 일인데, 결국 그걸 망친 것은 나나 그 선배가 아니라 만두를 구워오라고 한 사람의 무례함이다. 


그 무례함은 그의 나이, 지위, 성별이 가진 알량한 권위에서 나왔을 것이다. 내가 선배들을 의지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게 된 많은 배경 속에는 거의 항상 그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속한 조직에 대한 애정, 희망, 미련 같은 것들과, 존경했던 예술가로서 감독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미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미워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미워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뭐가 정말 문제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아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일지 모르겠다. 정말 미워해야 할 사람이 정말 누구인지 아는 것도.


  


by 세상쫄보

연기 10년 하면 뭔가 될 줄 알았는데, 6년차에 다시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


소글매거진

소글워크숍 중에 초고를 쓴 뒤 발전시켜 완성한, 수강생들의 원고를 싣고 있습니다. 

여성전용 글쓰기 클래스 '소글워크숍' 카카오플러스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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