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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Oct 23. 2019

우리 딸은 맨날 전화해,
얼마나 착한지 몰라

어쩌다 전화를 걸면,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지

왕십리 오거리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늦은 여름, 한낮의 더운 기운이 가시고 나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벤치에 앉아 청바지 입은 다리를 쭉 펴본다. 여기를 넘어가면 전풍호텔이 나온다는데 그 너머까지 가본 적이 없다. 왕십리의 유명한 명물 학다방 3층에 사무실이 있다. 전풍호텔만 넘어가면 큰 시장이 나오고 번화하다지만 학다방 건물은 볕이 잘 드는 것 말고는 낡은 건물이다. 


사장은 수습 3개월이 지나도 월급은 5만원밖에 올려주지 않으면서 “우리 미쓰리, 일 잘한다.”고 칭찬은 지겹게 해댔다. 사장이 어느 지방지에 보낼 칼럼을 “미쓰리가 교정 보세요.” 하는 바람에 토요일엔 4시에 퇴근하라고 해놓고선 5시가 거의 다 되어서 퇴근하는 길이다. 


옥수동까지 가는 마을버스는 15분에 한 대씩 오는데 좀 전에 한 대가 지나갔다. 금호동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경찰서 옆으로 회차를 했다. 저걸 타고 금호역에 내려서 조금 걸어갈까 생각하다가 전화를 건다. 대명동언니가 집에 와 있는 모양이다. 엄마보다 열 살 어린 이종사촌언니, 큰이모의 큰딸이 대명동언니다. 이모조카 사이지만 엄마에겐 친동생 같은 존재다. 엄마는 유난히 들떠서 말이 많았다. 


“그래, 얘~ 이제 퇴근하니?, 응, 00이. 얘는 매일 전화해. 얼마나 착한지 몰라.“ 

전화 수화기를 들고서 대명동 언니에게 더 많이 이야기하는 엄마. 꾀꼬리같이 들뜬 목소리. 


왕십리의 그 회사는 첫 직장이었지만 6개월 만에 끝났다. 돈도 안 되는 칭찬만 해대던 그 회사에서의 마지막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절대 칭찬을 하지 않는 상사를 만나 지금껏 같이 일하고 있다. 그래도 그때 그 낯간지러운 칭찬을 들으면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난 거기 별론데, 나보고 자꾸 잘한다 그러잖아.” 그러면 엄마가 그래도 우리딸 인정받고 일하나 보네 생각해줄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날은 엄마의 귀가가 유난히 늦었다. 퇴근 시간 즈음에 전화를 하면 간혹 못 받는 날도 있었지만, 시장에 갔다가 비슷한 시간에 귀가하던 엄마였다. 옆 동네에 사는 친척 아주머니와 만나기로 했지만 연락이 어긋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고, 건강의료기기 매장에서 안마기 체험을 하고 집으로 와야 하는데 그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고 아버지가 전했다. 그리고 나서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의 짧은 통화. 

그전에도 눈이 침침해서, 쇠쇠하는 이명 때문에, 소화가 잘되지 않아, 잠이 잘 오지 않아, 유난히 걱정 많고 힘들어하던 엄마에게 종종 들어오던 말이라, 그날의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엄마와 마지막 통화였다. 


다음날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수실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기다 12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엄마는 그렇게 떠났다.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는 이따금 들어본 말이었다. 엄마의 몸이 도대체 버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렇게 신호를 보냈다. 퇴근길에 엄마의 스산한 말을 듣고 귀가하는 날이 종종 있었다. 어쩌면 엄마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 시간이 그토록 빠르게 와버릴 줄 몰랐지. 아무런 대비없이 그렇게 엄마가 가버릴 줄은. 


처음부터 엄마에게 매일 전화하던 것은 아니었다. 햇볕이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불던 왕십리의 그 경찰서 앞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대명동언니에게 자랑하던 그 목소리에 부응하고 싶었다. 서울대라도 합격한듯, 대기업에라도 취직한듯 그렇게 좋아하던 목소리. 그날 이후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전화했고 가끔 한 번쯤 더하기도 했다. 그러다 과장 섞인 “얘는 맨날 전화해.” 하는 엄마의 말에 주술이 걸린 듯 매일 퇴근길에 전화를 했다. 


매일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엄마와 그 마지막 통화도 없었겠지. 


카톡 친구 정리를 하다가 한참 들여다보았다. 친절약국. 


카톡으로는 대화한 적이 없는데 자동으로 업데이트가 되었나 보다. 친절약국은 김안과 근처에 있는 약국이다. 망막색소변성증. 침침한 엄마 눈의 병명이었다. 무릎 수술을 한 이후에 눈이 급격히 나빠졌는데 실은 유전질환이라고 했다. (눈에 좋지 않다고 해서 나중엔 머리 염색도 하지 않았다. 엄마 머리가 그렇게까지 하얗게 셌는지 몰랐다. 염색을 하지 않으니 너무 예쁜 새하얀 머리가 되었다.) 김안과 근처에 있는 친절약국에서만 취급하는 눈 영양제가 있었다. 그 영양제는 내가 석 달에 한 번씩 주문했다. 그 영양제가 눈을 좋아지게 해주진 않지만 더 나빠지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친절약국에 그 약을 주문하지 않은 지도 1년이다. 고객관리를 열심히 하는 곳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허망하게 엄마가 떠난 지 1년이 되었다. 


작년 추석을 지나고 아버지는 제사와 차례를 모두 없앤다고 대소가와 친척들에게 이미 선언한 터였다. 평생을 조상 봉사한 엄마인데 엄마가 하던 대로 제사 한번은 해도 좋지 않을까 언니5가 물었으나 아버지는 완강하다고 했다.


엄마방을 정리하면서 나온 정리 안 된 지난 사진들을 언니6이 스캔을 받아 두었다. 언니5가 스크린이 있는 음식점을 예약했다. 사진들을 큰 스크린으로 넘겨보며 엄마를 추억했다. 아버지와 동생만이 지내는 오랜 우리 집에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언니5는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이 뭔지 물었다. 언니5는 “민정아, 잘 살아라.”하는 말이 듣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내가 들어본적 있다고 하는 바람에 언니5의 그 간절한 분위기를 깨버렸다. 언니들은 제각각 “조심해라.” “열심히 살아라.”를 주로 들었다고 했고, 나는 “열심히 잘 살아라.”가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인 것 같다고 마무리해버렸다. 


언니4는 책을 읽다가 엄마가 부르는 “수진아, 수진애이~” 하는 말이 환청처럼 들린다고 했다. 이 모임을 기획한 언니5의 출제 의도에 맞춘 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삐죽빼죽 나오는 대로 좋았다.


조율이시, 좌포우혜 없이도, 식용유와 참기름에 온 집을 튀겨대지 않고도 엄마를 그리는 우리 방식의 의식.


굳이 꼽으라면 “전화해줘서 고맙다. 너 아니면 하루 종일 말할 일이 없다. 네 전화 기다리면서 산다.” 하는 말이지만, 상관없을 것이다. 


퇴근길에 전화하면 반갑게 전화 받아주는 엄마 목소리, 내게는 그 목소리가 간절하다. 




by 도머구

소글워크숍에서 글쓰기 근육을 만들고 있습니다.


소글매거진

소글워크숍 중에 초고를 쓴 뒤 발전시켜 완성한, 수강생들의 원고를 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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