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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Sep 07. 2020

귀엽고 날카로운 바늘 하나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랄랄라! 이 글을 쓰려고 언덕을 마구 달려왔다.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처럼 활짝 웃으며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퍽 근사한 아이디어들이 뇌 속에서 뜀을 뛰고 춤을 추었다. 레몬즙을 떨어뜨린 탄산수를 큰 컵으로 만들어 책상에 앉았다. 꿀꺽꿀꺽. 큰 컵을 바닥까지 비우자 아이디어들은 탄산이 부서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쓰려고 했던 게 근사했던 건 맞니? 심리테스트나 mbti 검사지처럼 항목을 따라 빈칸을 메우면 "짜잔, 이게 당신이랍니다!" 한 편이 완성되면 좋을텐데. 이런 기분은 글쓰기에 대해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순간부터 지속되어 왔다. 만질 수 없는 선명함에 완벽히 속은 기분!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굴 거야? 언제나 내 쪽에서 염원하고 애걸하는. 결코 내가 먼저 뒷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순간도 오만하게 굴 수 없는. 그런 상대가 내게 주는 것이라곤 고작 이런 것이라니. 기막혀. 


이럴 때면 나는 늘 순순해진다. 무릎을 납작하게 꿇는다. '어쩔 도리가 없군, 아무 이야기나 해야겠네' 그만 둬 버리자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달리 핑계도 없어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은 가엾다. 악기의 현이 끊어졌다거나 물감이 다 말라버렸다는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다. 누구든 굴러다니는 볼펜과 종이를 어린이에게 줄 것이다. 글은 백사장에 손가락으로도 쓸 수가 있다. 이쯤 되면 정확한 설계도를 따라가며 견고한 성을 하나 짓겠다는 야심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나는 또 가진 것 없는 알몸이 되어, 나 자신에 대해 넌더리가 나는 부분부터 짚어가기 시작한다. '실수와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인기가 괜찮으니까 말이지...' 


무엇부터 말해볼까. 글에 관한 첫 순간의 기억부터 온통 거짓말이었다. 네 살 무렵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 쓰고 싶지만 정확히는 읽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내 몸만한 동화책을 거꾸로 잡고는 앉아 그럴 듯하게 문장들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나는 척척박사입니다. (다음 문장) 나는! 척척박사입니다." 어른들은 귀엽다며 계속 읽어보라고 했고 나는 지치지도 않고 읽었다. 귀엽다는 말에 둘러싸인 우쭐함을 느끼며 계속해서 문장을 지어냈다. 나는 척척박사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아침 동생을 돌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밥을 다 먹었습니다. 


걸음을 걷기 전에 이미 말을 잘 할 수 있었다. 울리지도 않은 전화를 붙잡고 통화하는 시늉을 하는 건 아이들의 특징이지만, 남의 집 아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동네 할머니들은 아이가 빛나게 영특하다고 부추겼다. 아이의 영특함을 ‘받쳐 주지 못하는' 부모가 될까 봐 겁이 났던 엄마는 여섯 살 어린이들 사이에 나를 집어넣었다. 우월함은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반작용을 일으킨다. 유치원 첫날부터 나는 열등한 아이가 되었다. (그 시절엔 어떻게 여섯살 반에 네살을 넣을 생각들을 했을까) 왼쪽과 오른쪽을 헷갈렸고 달리기도 간식 먹기도 늘 꼴찌였다. 유치원 가기 싫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황당하다. 


급하게 칭찬 거리를 찾아야 했다. 공기놀이도 고무줄놀이도 거의 해내지 못했지만 글만 쓰면 가장 빠른 아이가 되었다. 사전찾기도 늘 1등이었다. 아, 이거로군! 절대 놓치지 않겠어! 어른들이 듣기 좋아하는 문장을 쓰면 애국조회 때 단상에 오르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일요일에도 저 홀로 있고 싶어서 짜장면 그릇을 들고 안방에 처박힌 아빠를 발로 차 버리고 싶었지만 ‘우리를 위해 매일 수고하시는 아버지, 중국 음식을 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썼다. 칭찬 스티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박대하며 매사에 불신과 의심이 많으며 가족들을 이간질시키는 할머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꿈꾸었지만 ‘우리 할머니처럼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할머니를 존경한다'고 썼다. 칭찬 스티커. 


거짓말을 하고 칭찬을 받고 거짓말을 하고 상을 타는 일상을 사는 어린이는 열세살에 노파가 되어버린다. 종종 나는 친구들의 글쓰기 숙제를 대필해 주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쓰라는 숙제를 받고 머리가 하얘졌다는 친구에게 그게 뭐 어렵냐며 몇 분만에 한 바닥을 써주었다. 친구는 우수상을 받아 그 글을 단상에서 읽었다. 이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이 분단, 저 분단에서 점점이 키득거렸다. 나는 무표정하게 속으로 깔깔 웃었다. 선생님도 멍청이들이구나. 내 숙제는 내지 않았다. 


남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다보면 내가 정작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적어도 글에 관해서는 몇년 전까지도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받아들여질 만한, 영민하다는 말을 들을 만한, 읽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들 만한 문장들을 거미줄처럼 뽑아냈다. 베틀에 앉아 굳어버린 거미 화석의 기분을 안다. 세상을 똑똑하게 잘 살아보려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다. 


나는 멍청이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칭찬을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칭찬 스티커를 한 광주리 모아봤자 쓸 곳도 없었고 나는 백년은 산 것처럼 온전히 지쳐 있었다. 사랑에 빠진 순간을 명징히 기억하는 사람을 나는 언제나 신기해하는데, 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글쓰기가 재밌게 느껴진 어떤 처음을 기억하지 못하겠다. 오들오들 떨던 몸이 벽난로 앞에서 천천히 온도가 오르는 과정이 있을 것인데, 나는 언제나 갑작스레 느낀다. "아이고. 이제 볼이 뜨겁네!" 


사랑이나 관계에 대해, 과하고 민감한 사람으로 평가되거나 동정받을 것 같은 이야기를 썼다. 그런 건 넘쳐났으니까 내일은 또 무엇을 쓸까 설렜다. 나의 가족들을 마음껏 비웃었다. 오! 전혀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때 나는 나를 실험하는 흥분에 반쯤 미쳐 있었다. 할머니와 아빠를 사랑없이 비웃었고 가끔은 엄마를 사랑으로 비웃었는데 쓰고 난 후에는 악몽도 꾸지 않았다. 후련하고 놀라웠다. 누군가와 말로 대화를 하면 상대가 오해할 지 모른다는 불안이나 팩트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다는 부족이 남는데, 글로 쓰면 희한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걸 읽는 사람이 내 가족이 누군지 알게 뭐야. 실은 내가 돌아버린 인간이어서 모든 것이 내 망상의 조각들이라고 한들 네가 무슨 상관이겠니. 이건 새롭게 만들어진 완벽한 우주 모양 큐브라구! 


에세이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100퍼센트의 사실이 아니어도 된다는 발견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멋진 것을 알지 못하고 지낸 시간이 좀 아까웠다. 그러니까 너를 비웃을 생각은 언제고 결코 없을 거야! 


가끔은 페미니즘에 대해 안전한 선언이나 명저 인용보다는, 내 삶의 조각을 베어 썼다. 오해와 억측을 받았는데, 새벽에 깨어 그 말들을 노려본 적도 있었지만 그 따위 허들은 발로 넘어뜨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내 발길에 모래가 튀어 눈이 따가웠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순순해지기로 했으니, 또 별 것 아닌 결론을 내 보자. 손 가는대로 썼더니, 나는 멍청이들을 비웃기 위해 쓰고 싶다는 기이한 결론에 이르렀다. 한 번은 나를 한번은 내 밖의 멍청이들을. 이런 말을 팟캐스트에서 한다면  ‘어머! 너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건 편집해야 해' 라고 다정하고 엄하게 말할 것 같지만, 이건 팟캐스트가 아니고 글이라서 나는 그대로 두기로 한다.  더할 거야, 더할 거라구! 


상상력이 부족한 멍청이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고 인간을 얄팍하고 납작한 표본으로 만들어 보여줘야 안심하는 머저리들. 멍청이를 비웃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랜 취미니까. 나 자신조차 목적어로 포함해서. 


나는 앞으로도 한눈에는 대단치 않아보이는 귀엽고 날카로운 바늘을 품고 다니며 그들을 한번씩 찌를 예정이다. 이건 의미가 있다. 가장 발각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은 내가 바르고 착한 어린이가 아니라 늘 한쪽 입술을 올리고 남을 비웃는 나쁜 어린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게 머리를 안 굴리고 살면 편하고 행복한가?"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들어올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 세상에서 버려질 것이라는 공포. 언젠가 나는 나의 귀엽고 날카로운 바늘로 그 풍선을 터뜨린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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