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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Aug 06. 2021

우아하긴 글렀고 박력이나 있을란다

퀴노아 샐러드 대신 불닭볶음면

여름밤에 프랑스인들은 자주 테라스에서 가벼운 알콜을 마신다. 해는 저녁 9시까지 떠 있다. 여전히 밝은 밤에 집에 있으면 뭔가 큰 손해를 보는 기분이라 나도 종종 테라스로 나간다. 나른하게 취해 집에 돌아오면 바로 눕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든 도시락통에 무언가라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어두고 자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아니면 아껴둔 컵라면을 뜯어야 하니까! 


왜냐. 내 혀는 아시안이니까! 한중일타이베트남까지는 괜찮아, 그런데 영프독미는 안돼. 그건 저녁에도 먹고 긴긴 크리스마스에도 주구장창 먹고 현지 친구를 만나도 먹고, 하여간 어딜 가든 먹어야만 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그건 '혼자 호젓이 한식을 즐길 기회'인 점심으로 칠 수 없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에게는 점심 식사가 낙이란 말이다. 출근하기 싫은 날에도 '점심에 에멘탈 치즈 얹은 김치볶음바아아아압...'중얼거리며 신발에 발을 꿴다. 


물론 도시락을 잊어도 해결책은 있다. 근처 식당에서 테이크 아웃할 수 있는 건 꽤 많다. 코로나 시대를 건너면서 테이크아웃의 지분이 부쩍 커졌다. 미슐랭 별점을 받은 레스토랑에서도 자존심을 버리고 테이크아웃 판매했다. 


하지만 저녁에는 집에서 서양요리를 먹을 텐데, 점심에도 서양요리를 굳이 8천원에서 만원을 주고 사 먹고 싶지는 않다. 프랑스 식당에서 도시락으로 파는 것들은 이렇다. 작은 파스타류를 넣은 샐러드, 각종 수프. 치즈와 야채를 넣어 구운 파이류, 바게트 안에 참치나 연어, 생햄, 치즈, 토마토 등을 끼워넣은 샌드위치 등이다.여기는 지방 소도시라서 파리처럼 아시안 식당이 많지 않아 아쉽다. 한번은 태국식 쌀국수 볶음을 파는 가게를 보고 달려갔는데 거금을 줬지만, 영 맛이 없었다. 


이러니 만취한 날에도 쌀국수 봉지를 뜯어 국수를 물에 불려서 야채와 계란을 넣고 달달 볶아서 한김 식혀서 도시락 용기에 담은 뒤 스리라차 소스를 한 바퀴 두른 후 뚜껑을 닫고, 침대로 가는 것이다. 


한번은 지갑을 들고 수퍼나 식당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케밥을 샀다. 공원에서 먹다 양고기 한 조각을 흘렸을 때 비둘기 열 마리가 한번에 몰려와 기겁하게 되거나 1인분의 케밥이 너무 너무 커서 다 먹으면 몸을 가누기 어려운 점을 빼면 싸고 맛있다. 


자주  "참치김밥 한 줄만 사다줄래?"라고 밥 먹으러 나가는 동료에게 부탁하는 상상을 한다. 3500원에 식사가 끝난다면 얼마나 황홀할 것이야. 처음엔 한국 동료와 줌으로 한참 회의를 한 뒤 한국의 시공간에 영혼이 머물러서 나도 모르게 "GS 가서 뭐 좀 사올까?" 생각하다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처음 프랑스에 와서는 식사 습관을 고쳐 보려고 노력했다. 노력하면 나도 작업실 동료들처럼 콩이나 퀴노아등의 곡물과 다양한 계절채소로 만든 샐러드를 먹고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들은 각종 샐러드를 먹고 사과 한 알을 베어문다. "그리뇨떼(주전부리나 간식 먹기를 부르는 말)를 해서 나는 식사는 거르기로 했어." 라고 말하는 사람도 꽤 있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그게 몸에 좋으니까,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나의  엄마는 한식이 세상에서 가장 몸에 좋다고 하지만, 이 사람들이 먹는 점심을 보면 그 말이 쏙 들어갈 것이다. 작업실 동료들은 요가와 명상을 좋아하거나 텃밭 가꾸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다수라 식사도 건강하게 한다. 그들은 일하는 도중의 점심은 가볍게 먹고 대신 저녁을 늦은 시간에 제대로 먹는다. 


한번은 작업실에서 식사에 레드와인 한잔을 곁들여 점심 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 다들 이렇게 말했다. "뭔가 거한 게 지나가니,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네?" 나는 이미 잘 집중하고 있었다. 펄펄 끓는 부대찌개나 동태찌개에 밥 한 공기를 다 먹고도 오후 업무를 하던 한국인의 어떤 강점을 보여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식사는 페타 치즈를 넣은 주키니 파이에 잎채소 샐러드, 디저트는 치아씨드 푸딩이었다. 그걸 먹고 졸리단 말이야? 


말은 바른 말이다. 탄수화물을 억제한 샐러드는 사실 업무효율에는 최고다. 큰 볼로 가득 먹어도 식곤증이 없고 몸도 가볍다. 하지만 문제는 40년 넘게 내 몸에 배어든 한국적 식욕이다. 식사가 건강하면 일이 안 되는 건, 모든 일을 '악으로 깡으로' 했던 과거의 프리랜서 경험이 뇌에 박혔기 때문일까. 


잡지 마감을 할 때, 밤 10시쯤 되면 슥 빠져나가 잡지사 근처 허름한 술집에 가서 매운 낙지 볶음이나 야채곱창 등 맵고 기름진 안주에 쏘-주를 몇 잔 걸친 뒤 와서 교정을 보기도 했다. 쩌르르한 느낌이 온몸을 순환하면 "내가 왜 사나. 일하려고 사나." 하는 생각은 부르주아의 것으로 치부되어 소멸해 버렸다. 


그때 뇌 속은 이러했다. 

'으어어어어어-'

'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

'흐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꽥..........'

죽을동살동 눈을 부릅뜨며 교정을 보고는 

'으으어어어어'한 표정으로 지하철을 타고는 

집에 가서

푹 쓰러져 잤다.

다음날엔 

'으으어어어어으어어어어 시발'

하며 깨서 다시 

어제 앉았던 자리로 가서,

어제 하던 일을 하였다. 


원체험은 강력하여 몸에서 빠져나가질 않는다. 



내게 샐러드 데이즈는 최대 이틀이다. 사흘째 되면 '으어어어어' 소리가 나는 음식에 대한 욕망이 들끓어 도무지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  일은 어떻게든 한다 해도 글은 잘 안 써진다. 글쓰기 전의 초조와 불안에는 맵고 짜고 뜨거운(쓰면서도 침이 고인다) 해물과 미역을 추가한 너구리 빨간 맛 혹은 가루스프를 넣다가 기침이 나는 열라면이 적격이다. 제육볶음에 고슬고슬한 흰 쌀밥을 비벼 먹어도 좋다. 순대국 한 수저를 떠먹고 풋고추를 아작, 씹어먹어도 괜찮다. 


이 모두, 어떤 불안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다. 탄수화물은 신경줄을 느슨하게 만드는데, 한국 특유의 맵단짠은 2-3배의 효과가 있다. 어제도 불닭볶음면 컵라면에 참치를 넣고 마요네즈를 쭉쭉 짜넣어 후루루루룩 마신 뒤에 글을 한 편 썼다. 캐롤라인 냅은 알코올의 힘에 의존했다고 고백했고 수전 손택은 정신 상태를 하이하게 유지하는 약을 먹고 식사를 거의 하지 않으며 걸작들을 써냈다는데....


어떻게 나의 중독은 맵고 걸쭉하고 박력있는 무언가일까. 

 

이번 생엔 우아하긴 글렀고 박력이나 있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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