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나는 산만함의 신에게 구원을 구하는 여자로 변해 버렸다. 코로나 시대의 유럽에서 아시안 여성 이민자의 정체성을 입었다는 그럴 듯한 라벨. 아침엔 분노가 끓어 올랐고 저녁엔 움츠러 들었다.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을지 전혀 알 수 없어서 평균대 아래로 고꾸라져 버렸다.
고꾸라진 김에 이리 저리 굴러보기로 했다. 한 점을 향해 집중하지 않으려고 결심한 순간, 인생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리란 것을 눈치 챘다. 서둘러 방향을 바로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몹시 피곤했다. 이런 예외적 시절도 있는 거라고, 나만의 시절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최고조로 산만하게 굴었다.
나는 어리지 않았다. 한국의 친구들은 하나 둘 안정적 일상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잘 지내냐는 인사에는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 지 몰라 고민하다가 동그란 노란색의 미소 이모티콘을 보냈다. 삶의 디테일을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으려 작정하니 머릿속은 더욱 산란해졌다.
프랑스에서는 이민자에게 무료로 일정 시간의 불어 교육을 제공한다. 이곳에서 나는 ‘배우자 비자’로 생활하는데 아마 가장 안정적인 형태의 비자일 것이다. “너는 비자를 위해 결혼했지?” 를 모욕으로 던지는 남자와 그 모욕에 오열하는 여자를 보며 나는 내 비자의 부정적 뉘앙스를 보게 되었다. 아무튼 이주를 선택했으니 한국에서 미리 불어를 공부했다. 단기간에 기초 문법책 한 권을 끝내주는 한국식 속성 불어 교육을 받은 뒤 시험을, 가장 낮은 단계였지만 아무튼 고득점으로 통과했다.
그러니까 그럭저럭 자신만만했었는데 현지의 기초 불어 테스트에서는 가는 귀가 먹은 사람처럼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 질문을 잘못 알아듣고도 그런 줄을 몰라서 나는 내가 꽤나 훌륭하게 대답을 한 줄로 알았다. 엉뚱한 대답을 길게 한 것이었다. 면접관은 그만 말해도 된다는 눈신호를 보냈다.
“당신은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되지 않네요.”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하마터면 미안하다고 대답할 뻔 했다. 말을 삼키려 재빨리 입술에 힘을 주었다.
“아, 그런가요? 제가, 그렇군요. 소통을 할 수가 없는 거군요.”
“네. 그렇답니다. 100시간의 의무 교육을 받으셔야 해요.”
이민자가 된다는 것은 계획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불어 의무교육은 당연히 면제일 거라 예상하고 다음달의 일정을 빼곡하게 짜 두었는데 시험에서 떨어졌다. “실패는 되게 오랜만이야.” 멍한 기분으로 위로주를 마셨다. 열패감보다는 내가 만든 계획에서 이탈하는 데에서 오는 당혹감이 더 컸다.
“프랑스에서는 말을 잘하면 예외가 많아요. 일단 학교 면담에 가서 수업 시작을 뒤로 미루고 싶다고 요청해 보세요. 별 것 아니니 들어줄 거예요.” 한국인 지인이 유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절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 오후부터 바로 수업에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서둘러 볼펜과 공책, 생수와 햄 샌드위치를 사 왔다. 학교는 십몇년 만에 처음이었다.
긴장감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풀렸다. 100시간을 부여받은 나를 보고 동급생들은 머리가 좋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교실에는 나를 위한 역할이 이미 마련돼 있던 것 같았다. 나는 퍼즐 조각처럼 빈 공간에 맞춰졌는데,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며 성격이 밝고 다정하며 (불어는 잘 못하지만) 머리는 좋은 학생이었다. 쉬는 시간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큰소리로 말을 했다. 그들은 오래 안 사이처럼 내게 허물없이 농담을 건네 왔다. 선생님이 학생들의 수다를 제지하러 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듣기 싫을 정도로 농담들은 재미있었다.
나는 400시간이야, 대충 알아듣는데 글을 못 쓰거든. 나이 들어서 머리가 딱딱하다고. 하지만 쟤는 600시간을 받았어. 쟤는 나보다 어리지만 머리가 나보다 바위야. 태어나서 연필을 처음 잡아볼 걸?
교실은 여러 개의 언어로 일렁였다. 미얀마, 칠레, 한국, 아프가니스탄, 수단, 소말리아, 에리트리아, 알제리, 모로코. 쉬는 시간이면 나는 자주 성경 속 바벨탑을 떠올렸다. 1분단과 4분단의 사람들이 나누는 아랍어가 공중을 오갔다. 내 앞과 내 뒤의 사람이 나를 카페 테이블처럼 두고 스페인어로 자기 나라의 정치 이야기를 했다. 바벨탑이 무너지는 데에는 어떤 쾌감이 있긴 했다. 소음 때문에 언제나 머리에 미열이 있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언어의 카오스 속에서 나는 자주 혼미해졌다. 내 입에선 불현듯 한국어가 쏟아지곤 했다.
“못 알아듣겠어. 천천히 말해. 뭐라는 거야?”
성령을 입은 신자처럼 방언을 쏟아내면 친구들이 나를 유령 보듯 보았다.
“이런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 봐. 따가따가따가. 말발굽 소리처럼 들려!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너희들 모두 바보라고 말했지.”
친구들이 너무 좋아서 나는 자주 낄낄거렸다.
디스트레. distrait. 이 형용사를 검색하면 머리가 구름 속에 둥둥 뜬 사람이 나온다. 뜻은 꽤 부정적이다. 정신이 산란한, 멍한, 방심한, 경솔한. 그런데 이 단어가 모양을 약간 바꾸어 타동사 distraire가 되면 즐거운 빛을 띈다. 근심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다, 기분을 풀어주다, 무료함을 달래다.
단박에 나는 이 단어가 좋아졌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들은 distrait를 상대를 놀리기 위해서만 사용했다. “너 지금 디스트레해!” 수업 시간에 멍한 눈빛을 보이는 친구를 보면 총알처럼 이 단어를 쏘아댔다. 우리는 고작 단어 하나에 더없이 즐거웠다. 나는 가장 총알을 많이 받은 학생이었다. 고국에서 모범생이었던 추억은 종이짝이 되었다. 책상에 앉으면 업무와 가정사가 떠올랐고 게다가 정돈되지 않은 학습 환경에 당황스러워 자꾸 정신을 놓았다.
한번은 내가 수업 시간에 스마트폰으로 업무 카톡에 답장하다가 담당 선생님 마비에게 지적을 받았다.
"당신은 산만하네요."
쉬는 시간에 나는 하소연을 길게 늘어놓았다.
"너무 빠르다구요. 제 귀에는 하나도 안 들리는 걸요. 선생님 불어를 하나도 못 알아들어서 자꾸 멍해져요."
마비의 말이 너무 빨라서 학생들이 여러 번 건의했지만 개선해주지 않는다는 친구들의 불만사항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친구들의 대변자가 된 기분에 으쓱했다.
마비는 영어로 나에게 가이드를 줬다.
“처음이니까 안 들리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어요? 단어 하나하나에 개의치 말고 수업 내내 집중을 하려고 노력해 보세요.”
“거의 안 들리는데도요?”
“귀를 열고 그냥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라는 뜻이에요. 앉아 있는 것에 정신을 모으면 언젠가는 들릴 거예요.”
옳거니. 그 이후로 나는 좀 다른 방식으로 산만했다. 단어들을 모두 잡아채려다 제풀에 탈진하는 습관은 차츰 사라졌다. 하지만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좁은 교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오후 수업 담당 선생님은 학생들의 식곤증과 성인들 특유의 집중력 부족을 고려해 자주 단어 게임을 했다. 게임은 못하지만 교실이 와글와글하니 버틸 만 했다. 하지만 오전 수업은 고역이었다. 3시간 동안 이어지는 마비의 속사포같은 불어는 나에게 언어라기보다는 미지의 소리였다. 조개 속에 들어앉은 듯 골이 왱왱 울렸다.
나는 몸 움직이기를 택했다. 사전의 음성 서비스를 찾고 싶은 단어를 만나면 대신 손을 들었다. “선생님 본토박이 발음 좀 부탁드려요!”
볼펜을 떨어뜨리면 옳다구나 싶었다. 손이 닿는 거리여도 뒷자리 럭비 선수 친구의 널따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늘 무릎 위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뉴질랜드의 친구들에게 쉴새없이 메세지를 보내곤 했는데, 얼마나 집중했는지 여러 번 두드려도 모르곤 했다. 그러면 후디를 잡아당겼다. “고향 친구들에게 이 학교가 얼마나 멋진지 전하고 있어? 펜이나 주워 줘.” 학교는 초라했다. 커피 자판기가 두 개였는데 몇 달째 모두 고장이 나 있었다. 몇주에 한번씩 ‘자판기가 수리됐다’는 헛소문이 돌았고 그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달려갔는데 늘 허탕이었다. 정수기도 없어서 물병을 가져오지 않은 학생은 갈증을 견뎌야 했다. 식사 공간이 코로나 사태로 폐쇄되자 우리는 기찻길이나 층계참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산만한 건 너무도 즐거웠다. 쉴새없이 장난을 치는 것은 나의 적성이 됐다. 철자를 가까스로 그리고 있는 친구의 노트에 펜을 들고 침범했다. 한국에서의 나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렇게 했다. ‘도와줄까’라는 질문은 생략해 버렸다. 그가 거절해도 도와주고 싶었으니까. 잘못된 방식으로 연필을 쥔 주먹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내가 소문자로 단어를 쓰면 그는 읽지 못했다.
“이렇게, 이렇게 써야지. 너 모르는구나.”
그는 바둑알만한 대문자 알파벳들로 단어를 썼다. 모든 선생님이 대문자로 판서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 나라마다 알파벳 소문자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한 것은 없었고 각 나라의 문화들은 모두 달랐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타인을 한심하게 여기는 뜻이 아닌 문화가 있다는 것, 땅콩이나 옥수수 튀김과자를 큰 봉투째 가져와 여러 사람과 나누어 먹는 문화가 있다는 것, 상대가 거절해도 거절을 받아주지 않고 코트 주머니에라도 땅콩이나 과자를 부어주는 문화가 또 있다는 것, 이천원 정도는 갚지 않는 (친구라면 그 정도는 주는 것) 문화가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의 연필이나 지우개를 가져가는 것은 그렇게 놀랄 만한 잘못이 아닌 문화가 있다는 것, 남들 앞에서 엉덩이를 큰 각도로 흔들며 춤을 추는 게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아닌 문화가 있다는 것.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는 그런 것들을 듣고 보느라 나는 산만했다.
마스크 아래로 콜록대는 친구에게는 리콜라 캔디를 건네줬다. “어이, 코로나! 이거 먹어.” 모두 깔깔대다 이내 발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했다.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코로나.
학창 시절 내내 고요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이런 방식으로는 지내본 적이 없었으므로, 선생님 눈에 덜 띄는 눈치를 배우지 못하고 컸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친구와 공부 방법에 대해 의논했는데 (그냥 잡담도 아니었는데!) 나만 눈에 띄어 다른 교실로 옮겨 혼자 있어야 했다. 내 손동작과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교실에서 떠들다 벌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디스트레를 이제야 배우고 있었다. 노인대학에서도 인간은 성장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모든 배움이 내게 즐거웠다.
산만함이 특성인 사람이었지만,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언제나 두려워했다. 어쩌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긴장을 놓아 타고난 산만함을 마음껏 표출한 후에는 늘 은은한 수치심을 느꼈다. 코로나 시대라는 괴로운 시기를 건너고 있다는 핑계는 달콤했다. 현실에 집중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너 지금 뭐하고 있니?" 라는 질문이 가장 위험했다.
정면을 바라보며 질주할 때도 있고, 게처럼 옆으로 걸으며 장난을 칠 때도 있는 거겠지.
그리고 곁에는 옆으로 뒤로 좌로 우로 걷는 다양한 친구들이 있어 결코 외롭지 않았다.
소은성 <친구들에게>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 사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메일로 보내드리는 에세이 메일링입니다. 새로운 시즌 구독은 작가소개에서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