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나에게 실망하고 나를 오해하며 떠나갔다.
죄책감에 대해 써보자. ADHD로 태어난 이상 죄책감은 가장 가깝지만 지겨운 친구다.
하지만 어려운 주제의 글을 쓸 때는 일기부터. 요즘 어떤 일이 있었더라?
우리 A인들은 현재형 사고를 한다. 과거를 잘 잊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프랑스에 온 뒤로 내가 아프다는 정체성을 잊었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대형 쇼핑몰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매운 걸 먹고 누워버리지 않는다. 한국과 떨어져서일까. 아니면 매운 걸 안 먹어서일까. 아니면 소음공해와 오염이 덜해서일까. 파트너가 있어서일까. 대체 왜일까. 지난 토요일에 햇볕을 너무 받아 쓰러질 뻔했다. 프로틴 바를 사서 두 개 뚝딱 먹고 좀 살아나서 모임에 갔다. 아주 피곤했지만, 아픈 것으로 카운트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픈 몸이 아닌가?
아무튼 현재형 사고에 대해 말해보자. 마시멜로우 실험을 떠올려 본다. 눈앞의 마시멜로우? 난 안 먹는다. 마시멜로우를 싫어한다. 나라면 초콜릿을 놓으라고 광광거릴 것이다.
이보소 연구소 양반. 마시멜로우 따위에 누가 중독이 되겠소? 아이들의 취향을 반영해 떡뻥, 초코과자, 아이스크림 등을 각각 배치하란 말이오.
그렇다. 이렇게 갑자기 삼천포로 빠져서 나만의 왈왈소리를 신나게 늘어놓는 게 또 우리의 특징이다. 또는 나 혼자만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개개인별로 너무나 성향이 달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기 어렵다는 것도 A의 특징이다. 성실왕이어서 모임에 늘 일찍 오고 절대 빠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교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전형적 이미지와 달리 ‘너무 조용해서 있는 줄도 몰랐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A도 있다. 주로 여성이다. 바로 내 경우다.
너무나 점잖은 아이라서 사주팔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을 때 엄마가 그 양반 참 잘 맞춘다며 온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추천했다.
“애 머릿속에 영감이 하나 앉아있네.”
아, 나는 정말 에이디에이치디가 맞나 보다. 한국에서 한 일의 여러 파트가 새까맣게 지워졌다. 구글 캘린더와 이메일, 슬랙, 카톡, 사진첩, 그리고 내 일기장에 기록되지 않은 일은 급속도로 녹아버린다. 새럼님의 얼굴을 보고 아, 선이 참 난초같은 얼굴이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00님을 안다. 카톡방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목소리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00님의 목소리와 말투가 좋고(나는 사람의 목소리에 대해 이런 생각을 늘 한다), 그가 카톡으로 나누어 준 따숩고 위로되는 말들로 인해 내적 호감이 있다. 그러나 00님이 오늘 처음 오신 줄 알았다. 아마 아픈 몸을 말하다 워크숍은 늘 감정의 파고를 안고 보통의 글쓰기 수업에서의 긴장된 강사 무드가 아니라 자연인인 나로서 참여하므로 기억력이 더 떨어졌을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
“언니는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내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열심히 듣고는 자주 까먹는다며 굉장히 서운해 한 삑삑이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삶의 고단함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싫어서인지 연락이 두절됐기 때문에 나는 은은한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아, 나의 기억력 때문에 나와 멀어지고 싶었나. 아니면 그냥 자신의 우울 때문이었을까. 죄책감은 ADHD가 평생 검으로 베어내야만 할, 우리의 친애하는 적이다.
이럴 때 나는 상대에 대한 미안함과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폭삭 주저앉는다. 아, 예전에는 주저앉았고 지금은 햇볕에 휘청, 어지러운 그 정도 느낌이다. ADHD 확진을 받고 A친구들과 수만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폭삭이 휘청으로 완화된 것이다. 내가 이전에 한 일이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은 나와 친했던 사람들을 무수히 실망시키고 그들이 나를 오해하게 했다.
내가 그를 비난하자 그도 이렇게 받아쳤다.
소은성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
소은성은 변덕이 너무 심하다.
소은성은 전에 한말을 기억 못한다는 연기를 해서 결국 자기 원하는 대로 한다.
소은성은 자기가 쓴 책과 다르게 산다. 에세이에서는 아름다운 말을 써놓고 실생활은 그렇지 않다.
한번은 내가 한국에서 프랑스의 땡땡이라는 관광지에 가자고 맞장구를 치고는, 프랑스에서 조우한 그 친구에게 “땡땡은 너무 한국인 천지야. 가기 싫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말 바꾸기가 겹쳐 그 친구는 나에게 신뢰를 잃었다. ADHD라는 거짓말로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잘못을 무마시킨다고 그녀는 말했다.
기억은 이러한 느낌이다. 보자, 만약 지난 회차 녹화영상을 보면 나는 당연히 00님의 이야기를 온전히 기억한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기억력은 언제나 좋은 편이니까.
하지만 이 언어능력에 대한 우수함으로 아이큐가 높게 나온 점은 내가 A임을 일찍 알 가능성을 차단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은 엄마를 불러 말했다. 아이가 너무 생각이 많아요. 성적이 우수한데 희한하게 산만해요.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왜 생각이 많니. 너는 왜 생각이 많니. 나는 줄줄 울면서 말했다. 죄송해요. 왜 그런지 저도 모르겠어요. 생각 안 많을게요. 생각 적게 할게요. 그때의 식탁 전등불의 느낌이 기억난다. 노랗고 따스했다. 그 아래서 나는 숨을 못 쉬도록 울었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엄마.
아, 오늘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까 엄마에게 생각 적게 하겠다고 빈 이야기는 즉석에서 말한 것이다. 미리 쓴 내용이 아니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떠올라, 이 워크숍에서 나는 자주 입으로 문장을 쓴다.
나는 이다혜와 함께하는 <소리 내어 글쓰기-아픈 몸을 말하기> 워크숍이 참 좋다. 온갖 루틴과 ADHD지침서를 껴안고 매일 노력하는 나를 잠시 쉬게 한다.
어제는 세상에. 엠비티아이에 아이엔에프제이가 나왔다. 나는 본래 엔프피다!
여기서 불어를 못해서 말을 잘 안 하고 한국어로 일만 하다 보니 아이가 나온 것이다. 업무에 살림에 외국어에 외국 적응 등을 더하니 태스크가 많아서 제이가 된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동물이고 보면 에이디에이치도 달라질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자마자 공유작업실 샤워커튼을 떨어뜨렸다. 나는 살포시 접어 구석에 두었다. 아무리 끼워도 끼워지지 않는, 약간 고장난 샤워커튼이라서다. 매번 실수를 완벽히 무마하기엔 너무 피로하다. 어제는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잤다. 파트너는 문자로 이 실수를 알려주었다. 그제는 가스불을 켜놓고 산책을 갔다. 하나만 말할게요. 가스불을 늘 확인하세요. 하지만 내가 있어서 안심하고 실수한 거겠지요. 그는 말했다. 그 말이 고마워서 그의 종이 호더. 즉 온 집에 잡지와 책을 바닥에 깔아놓는 습관에…화를 내지 않고, 나도 문자를 보낸다. 이렇게 두면 책이 상하잖아요.
하지만 내 환경이 급격히 바뀌었을 때 나는 현지 적응에 온 힘을 쏟아붓느라, 혹은 다른 이유로 이전의 일을 깜빡 잊는다. “그럼 전학 자주 다니는 애들은 어떡해? 그런 게 어딨어?” 라고 묻는다면, 나는 “전학이 잦았다면 나는 그나마 있는 유년기 기억이 하나도 없었을 것” 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무튼 이 뇌작용은 나 스스로도 아직 연구가 덜 끝났기에, 잘 설명할 수가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결론이 안 난다.
급하게 결론을 내보자.
아무리 바빠도 나의 일상을 문서화하자.
먼 훗날, 슬프고 고독한 에이 여성이 화석으로 발견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에이로서의 일상을 최대한 많은 단어수로 남기자.
고장난 뇌가 아니라, 독특한 뇌라는 사실을
모두의 뇌는 다 다르다는 사실을,
뇌과학 서적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상 이야기로 알게 되면
자신과 같은 독특한 뇌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우리는 하루를 온전히 살 수 있다.
나 자신을 하루 하루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고독과 수치심을 베어낼 검을 얻게 된다.
이것만은, 내가 절대로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진리다.
A클럽 기록: 널뛰고 흐르는 생각의 흐름을 검열 없이 쫓아가는 글입니다.
1회차 ADHD 글쓰기 모임이 8월 28일 일요일 오후 4시-6시로 변경되었습니다. 두 자리 남아있어요! 문의 및 신청은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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