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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May 19. 2018

제자리 멀리뛰기

칭찬은 객관적일 필요가 없다. 한껏 주관적이되, 다만 정확하면 된다

정확한 칭찬은 사람을 멀리 뛰도록 만든다. 나만의 ‘멀리뛰기’ 이론이다. 조그만 물웅덩이에도 반드시 발을 적실 정도로 운동신경이 전무하던 어린 나에게 체육시간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국민학교 6년 내내 체육점수는 양, 아니면 가로 고른 수준을 유지했다. 그런데 단 한 번, 체육 시간에 친구들에게 박수를 받은 순간이 있다. 제자리 멀리뛰기였다. 작은 모래밭 위, 지상에서 몇십센티미터 정도 위로 올랐을 뿐인데, '날고 있다'고 느꼈던 찰나.

 

멀리 뛰기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팔을 앞뒤로 흔들흔들하다가 마음 속으로 ‘얍!’ 외치고 무릎을 굽혔다 펴며 반동을 준다. 뛰는 순간에 ‘만세!’를 부르듯 팔을 앞으로 들어올려 머리 위로 쭉 펴며 튀어오른다. 그리고는 착지! 복잡하지는 않지만 팔과 다리, 상체의 움직임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앞으로 찰파닥 고꾸라진다. 또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그러면 엉덩이가 닿은 부분까지만 거리를 재게 되어 낭패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거나 뒤로 엉덩방아를 찧거나. 몇 분 후 내 미래를 두 가지 중 하나란 사실을. 별명이 애어른이던 시절, 나는 포기의 미학을 좋아했다. '일찌감치 포기하면 어떤 결과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잖아? 괜히 안간힘을 썼다가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버리면 너무 힘이 들잖아? 부정적 미래를 그리면 좋지 않은 점수에도 멋지게 미소지으며 돌아설 수 있지!' 그런 생각을 만화 주인공처럼 중얼중얼 했던 것 같다.


"얼른 종 치고 교실 들어가자. 점심시간에 공기 한 판 하자"고 친구에게 말하고는 발구름판에 섰다. 심드렁한 표정의 내게 선생님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줄 똑바로 서라고, 늬들은 왜 이렇게 느려터졌냐고 야단만 치던 체육선생님의 병가로 대신 들어오신 낯선 여자 선생님이셨다.


"자세가 아주 좋다. 연습했을 때의 양팔의 각도, 기억하지? 아까 한 것처럼만 하면 된다. 충분해! 할 수 있어! 아까 착지할 때의 자세도 아주 안정적이었잖아. ‘넘어질 것 같다’고 겁을 먹지만 않으면 돼. 마무리할 때 발에 힘, 딱 주는 거야. 알겠지? 자, 파이팅!”    

 

멀리뛰기를 하는 나...


온 세계에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지지해 주는 이가 생기면, 사람은 변모한다. 그 기대와 응원에 부응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 순간 그녀의 파이팅에 완벽한 착지라는 대답을 하고 싶었던 걸까. 서른 해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선명히 기억나는 건, 선생님이 나를 세세히 관찰한 후 해 준 칭찬이 마음에 차오르자 두려움의 자리가 줄어들었다는 거다.


눈빛을 모았다.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날아 올랐고,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온몸이 부웅, 몇 초간 땅 위에 떠오르는 감각이 얼마나 짜릿한지도 난생 처음 느껴 보았다. 그날의 점수는, 기억이 안 난다. 평균보다 낮았겠지. 하지만 지금도 기억난다. 점심시간 내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밥을 절반도 더 남겼다.


길고 섬세한 칭찬을 처음 받아보는 사람들

몇 년째 아카데미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전업이나 부업으로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은 성인들을 위한 입문 강의다. 기자 경력이 길지도 않은 상태에서 덜컥 강의를 시작했을 때, 얼마나 겁이 났던지. 몇번을 고사하다가 맞은 첫 강의날. 수업 시작 2시간 전부터 아카데미에 가 앉아 있었다. 떨려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강의안 끄트머리에 이런 다짐을 썼던 것 같다.

“100명의 학생에게 100개의 알맞은 칭찬을 하자.” 그리고 이렇게도 썼다.

“칭찬도 일물일어설이어야 한다.”


작가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은 하나의 대상을 규정하는 말은 반드시 하나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애매하고 뭉뚱그린 칭찬 말고, 누구든 해 줄 수 있는 모호한 칭찬 말고 정확한 칭찬을 하자는 다짐이었다. 날을 벼린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선생이 되자고 마음 먹었다. 초보 선생으로서, 내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실은 너무 어여뻤다. 그래서 자신감 없는 사람도 멀리 뛰게 만드는, 내 어린 날의 체육 선생님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과제 파일을 받으면 칭찬할 거리부터 샅샅이 찾았다. 비문이 많든 논지가 어긋났건, 칭찬할 구석은 반드시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설 때마다 칭찬을 받은 사람들의 함박웃음을 상상했는데, 좀 이상했다. 글을 칭찬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몇몇은 무표정이었고 누군가는 눈을 피하기도 했다.


“와, 어떻게 이렇게 기발한 제목을 구상했대요?”라고 말하면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제스처가 크고 칭찬을 구체적으로 아주 길게,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아주 큰소리로 하는 편이긴 하다. (그만큼 그 글들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응은 나로선 좀 신기할 정도였다. 큰 회사의 부장님이기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한 다 큰 어른들이 얼굴이 새빨개지곤 했다. "그만 하셔도 돼요."라고 말한 학생도 있었다.


좀 당황스러웠다. “너무 과하게 칭찬했나? 혹시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었나? 선생으로서 더 근엄해야 할까? 학생들이 내가 실력도 없이 칭찬 퍼붓기로 인기 모으려는 거로 생각할 거 같아, 옷가게 언니처럼 말야. 담백하고 우아한 선생이 되긴 글렀어. 난 좋은 문장을 보면 박수부터 나오는 사람이라, 어쩐지 촐싹맞아보일 것 같아."

친한 친구에게 내 염려를 고백한 날. 친구는 10초 정도 뜸을 들이더니 고맙게도 유년기에 대한 기억을 나누어 주었다.    


"칭찬을 들으면...솔직히 민망해. 자라면서 혼만 났으니까. 물병을 쏟거나 개어놓은 빨래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할머니는 '잘 한다, 잘해. 기집애가 야무지질 못해'라고 했어. 마치 실수를 예견한 비난 같았어. 아빠는 내가 어리바리해서 커서 밥벌이나 제대로 하겠냐고 했고.

자라면서 제대로 된 칭찬을 들어봤어야 세련되게 대응을 하지. 어른이 되어서도 누가 잘한다, 예쁘다고 하면 어색했어. '고마워요'라고 대꾸하는 것을 거울 보고 연습하기도 했었어. 연습하니, 잘 되더라? 사람들은 좋은 것에는 어렵지 않게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나도 다르지 않았다. 칭찬을 들으면 순간 몸이 굳어버린다. 대답을 하는데까지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곤 한다. 100가지 망설임이 머릿속을 휘젓는 시간.

‘어쩌지, 어떻게 답하지? 웃어? 은은하게? 알아요, 저도! 라고 대답해? 미친 사람 같을까? 고맙습니다가 나을까 감사합니다가 나을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정도가 예의바르고 현명해 보일 텐데 그건 너무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다. 에이, 뭘요! 정도가 적당하겠다. 대충 웃으며 넘어가면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칭찬 녹음을 밤마다 밤마다 돌려 들었던 때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볼까. 초보 기자이던 나는 글쓰기 아카데미 선생님이 “와, 제목 보세요. 첫문장 보세요. 글 다 읽어볼 것도 없이 이 분 글은 흡인력이 있네요.”라고 말씀하신 녹음을 열 번도 넘게 들었다. 글 마감을 앞두고 불안해질 때마다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선생님은 훌륭한 분이었으니까 그분의 권위에 기대 용기를 내보고 싶었을까.



아니야, 칭찬을 듣는 그 순간의 공기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 교실로 돌아가 앉고 싶어서다. 순도 깊은 열정이 끓어오르던 그 시절의 느낌을 다시 만지고 싶어서다. 새싹 시절의 무모한 용기의 냄새를 맡고 싶어서다. 취향 없고 몰개성한 글로 밥벌이를 할 때, 클라이언트의 말 안되는 요구에도 싹싹하게 웃어야 할 때, 그렇게 밥을 벌고 돌아온 날 밤, 일기장을 폈는데 쓸 말이 모두 소거되어 버렸을 때.


잘 단도리되어 반듯하게 접혀져 서랍속에 수납해 버린 내 진짜 감정이 도무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 그 칭찬을 떠올렸다. ‘나는 충분해. 언젠가는 아름다운 글을 쓰게 될 거야.'


고백하자. 나는 그 교실에서 도망쳐 버렸었다. 칭찬일지 비난일지 모르는 코멘트가 두려워 1교시 마치고 집에 갔다. 술도 안 고픈데 굳이 맥주를 따라 마시고 자 버렸다. 무엇이 그토록 무서웠을까.     


과제를 제출하고 1교시 내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서, 다들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이로 걸어가 버렸다. 누가 말을 걸까봐서 애써 어딘가 아프고 불편한 표정을 가장했다. 그런데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옆자리 언니가 녹음 파일을 보내줬다.


녹음은 매번 굉장히 무뚝뚝한 얼굴로 들었다. 비실비실 웃으면 갑작스레 다가온 환희가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배꼽 밖으로 흘러 나갈 것 같아서.

하긴, 아는 언니도 그랬었다.

"좋은 거 티내면 동티난다."

언니, 동티가 뭐에요 물었다.

"동티 몰라 동티? 서울 살아서 모르나 보네. 우리 진주에서는 그랬어. 좋은 거 소문내면 부정 탄다고. 아기에게도 '아유 못난이, 이렇게 못나서 어쩔거나' 그러거든, 어른들이."


주관적으로 정확한 칭찬이면 충분하다

칭찬은 객관적일 필요가 없다. 한껏 주관적이되, 다만 정확하면 된다. 주관적 정확이라고 부르자. 정확하려면 디테일해져야 한다. 이것도 기술이라 연습하면 분명히 나아진다. 그것도 급속도로. 좋은 건 쉽게 익숙해지니까.


그래서 오늘도 학생들에게 말한다.

"지금 드시는 그 커피 좋아요? 맛있어요? 전국민이 맛있다고 해야 맛있는 거에요? 아니잖아, 지금 당신 혀에 놓인 그 맛과 향기에 집중해요. 그 맛과 질감과 향기와 온도를 세세히 묘사하고 설명하고 소개해요. 칭찬은 블록버스터 별점 평가가 아니니까, 타인에겐 눈 감고 오롯히 내 느낌에 집중하여."


칭찬 머신인 나도 기운이 부족한 날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강의실에 들어가야 한다. 속은 간질간질 좋으면서 무뚝뚝한 표정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화장실 거울을 앞에 두고 파이팅을 한다.


"그들이 칭찬을 싫어하는 게 아니야, 익숙치 않을 뿐이야. 다들 경상도의 아들이라서 그래. 우리 모두 확장된 경상도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라 그래. 칭찬 들으면 껄껄 웃으며 '여~눈이 정확하십니다' 하면 건방떠는 걸로 보이는 나라에서 살아서 그래."           



김은성

purplewat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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