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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Aug 04. 2023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 아페로

랜선미식회 시즌1

랜선미식회 의뢰인: 정연주


은성, 한국은 갑자기 더워졌어요. 아직 5월 중순인데 어제 최고 기온이 30도였대요. 저는 이제 어떻게 살면 좋죠? 에어컨은 트는 순간 끌 수 없으니 아직 선풍기로 버티고 있지만, 저는 여름만 되면 햇볕에 녹아버리는 뱀파이어 아이스크림이 되어버리거든요. 언뜻언뜻 느껴지는 여름의 예고편 같은 기온에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어요. 정말 먹고 싶지 않은 그것, 더위와 겁.


그 와중에도 여름의 좋은 점을 꾸역꾸역 찾아본다면… 한가로운 노천 카페에서 최적의 온도보다 서늘하게 칠링한 화이트 와인을 마시는 모습이 가장 어울리는 계절이라는 것이지 않을까요? 화이트 와인, 로제 와인, 스파클링 와인. 여름의 낮술이라면 자고로 딱 한 잔, 아름다운 화이트에서 로제 사이의 와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곁들이는 것은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과일, 올리브, 샌드위치, 샐러드. 솔직히 비빔면이라도 스파클링 와인이랑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더운 여름날 낮에 서늘한 와인을 마신다는 거죠. 시원한 와인이 아니라, 서늘한 와인.


낮술이라면 오후 업무에 방해가 될 것 같지만, 식전주로 딱 한 잔이라면 식사가 끝나고 돌아와서 발동을 걸 즈음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닌가? 왜 음주 후 업무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잡지 기자 시절에 밤낮 없이 마감을 할 때의 기억 때문이겠죠. 그때 교열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원래 교열 담당은 정시 퇴근하고, 기자들은 저녁에 반주 한 잔 걸치고 벌건 얼굴로 돌아와서 밤새 원고를 잔뜩 교열 책상에 쌓아두고 퇴근하고, 교열을 다 볼 때 즈음 오후에 출근하는 거라고. 그때는 반주가 원고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젊어서 그랬던 거겠죠. 사실 지금은 휴일이 아니면 낮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아, 그래도 5월부터 지금 이 더위는 너무한 것 같아요. 나에게 스파클링 와인을 달라! 반 잔이라도 괜찮다!


이미지 출처 : Pinterest


랜선미식회 해결사 : 소은성


프랑스 문화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게 ‘아페로 Apero’예요. 식전에 간단히 술과 안주를 즐기는 시간을 아페로라고 부른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해가 점점 길어지면 ‘초여름 밤의 아페로’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를 시작해요. 일어나기 싫은 아침에도, 덥고 지치고 피곤한 한낮에도 아페로를 기대하며 버티곤 한답니다. 



밥 포함? 밥 안 포함?

술과 안주 이야기보다, 아페로라는 문화의 컨셉트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죠. 밥이 되는 푸짐한 안주 없이 술을 마신다? 이건 한국인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이슈입니다. 


중요! 아페로(식전주)문화는 밥 포함/밥 안 포함으로 나뉩니다. 보통 자신의 집에 초대할 때는 아페로에 이어 저녁 식사까지 대접하지만, 펍에서 만날 때는 아페로만 하고 헤어져 각자 집에 가서 식사를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간혹 집에 초대해서 아페로만 하고 밥은 안 주는 경우도 있나 봐요. 한인 커뮤니티에는 이런 글이 올라오기도 해요. “저녁식사 초대인 줄 알고 갔는데 맨 술에 버섯한 과자만 주고, 밥은 안 주더라고요. 전 배고프면 술을 못 마시는데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늘 쌀밥 한공기 먹고 갑니다.” 


이 경우엔 딱 아페로만 하자는 초대였던 건데, 이 분은 한국인이니까 당연히 저녁 술 약속=같이 식사하기, 로 생각하신 거였죠! 아페로가 저녁 9시까지 이어지기도 일쑤인데다가 저도 메인식사를 무려 밤 11시에 대접받은 적도 있어서, 이 분의 배고픔과 기다림에 공감이 가고 웃음도 나요. 저도 처음엔 아페로가 무엇인지 몰라 좀 헤맸어요. 친구가 "오후 5시에 아페로?"라고 초대를 했는데요. 저녁은 각자 집에 가서 먹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망설이다 못 물어봤어요. 각자 그림벌겐 앰버(황갈색의 아주 맛좋은 생맥주여요) 를 1리터를 마시고 집에 저녁 8시에 돌아와 소중하게 간직해 온 신라면 하나를 뜯어 끓여먹었는데, 8시반에 이미 해장까지 마친 거 있죠? 아무튼 술도 밥도 참 좋아하는 저에게 일찍 시작해 가볍게 마시고 집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한식을 먹는 건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습니다. 


술꾼들은 대체로 아페로 문화를 사랑하더군요! 술 좋아하는 우리 어머니도 스낵에 카스 캔맥을 두 개 드시고 메인 식사를 시작하니 어색함없이 “어우. 술 마시고 밥 먹으니 입맛이 더 돈다. 나는 이 아페로인가 뭔가, 맘에 드네?”며 좋아하셨어요. 하지만 알쓰인 제 한국 친구들은 저희 집에 와서는 (식사 대접 전의) 화이트 와인과 감자칩 등을 보더니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배고픈데 밥 좀 줘!” “우리 밥부터 먹으면 안될까!” 라고 해서, 저녁 6시에 급하게 식사를 차려낸 적이 많았어요. 


이미지 출처 : Unsplash


좋아하는 안주를 모두 모아 모아, 아페로 테이블 한 상

프랑스 사람들은 루틴을 좋아해요. 일요일 점심은 무조건 식사 전에 아페로를 하는집이 많죠. 정원에 이동식 테이블을 놓고 여러 종류의 술과 먹을 거리를 차리노라면, 흥 많은 저는 “아오, 살 맛난다!” 생각해요. 모두 서서 각자 좋아하는 술을 잔에 따르는 장면을 전 참 좋아해요.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로제와인, 샴페인, 포트와인, 로컬 맥주 등이 다양하게 놓인 광경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에요. (제가 너무 오바쌈바같지만…정말 너무 좋은 걸요) 


안주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새야 하는데…올리브, 각종 치즈, 견과류, 감자칩, 야채칩, 쏘씨쏭(건조 소시지), 미니 당근 등이 안주거리입니다.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있으면 아페로 테이블은 더 즐거워져요. 스페인에서 사온 하몽이라거나 지역의 로컬 맥주를 보며 하몽의 맛과 질감 또는 로컬 맥주 병 라벨의 타이포그래피나 드로잉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요. 프랑스 사람들의 신체 중 가장 중요한 부위는 ‘입’ 인 것 같아요. 식사 시간은 물론 아페로를 할 때에도 혀로 술의 섬세한 맛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촉이나 무게감을 느끼는 동시에 줄곧 말을 하죠. 


아페로 토크는 느슨하고 헐렁해요. 프랑스 사람들의 대화 패턴을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제가 사는 남프랑스 사람들은 "궁금하긴 하지만 검색을 하지 않으며 하는" 대화를 즐겨요. 예를 들어 와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또 하죠. 예를 들어볼게요. 

“포트와인 마실 사람? 지난 주에 포르투갈에 여행 가서 사 왔어요. 
“포트와인은 무슨 맛이에요?”
“난 달아서 포트 와인은 안 마셔요. 여름엔 가볍고 산뜻한 술이 더 좋더라구요.” 
“포트 와인은 그냥 와인보다 도수가 높고 아주 달콤해요.”
“‘포트’가 항구(port)를 의미하는 단어였나요?”
“아니지 않나요? 포트와인이 생산되고 배에 실려 나가는 도시 이름이 포르토porto라서 포트와인이라 부르는 거라던데요?” 


이런 대화에서 저는 스마트폰으로 포트 와인의 이름 유래를 검색하고 싶어서 손가락이 간질간질해요. 그럴 때는 손가락으로 피스타치오를 열심히 까버립니다. 누군가는 틀린 정보를 말할 테죠? 하지만 바로 검색을 하는 사람은 확실히 한국보다는 적은 듯 해요. 그리고 포트와인에 대한 대화는 누군가 이걸 마실 때마다 했던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어요. 술은 달고 바람은 산들산들한데요. 


대화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내가 아는 정보 혹은 나의 취향을 되새기고 그것이 타인의 말과 섞이며, 물감이 섞이듯 너와 내가 우리가 커다랗고 알록달록한 덩어리가 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요즘 화실 다닌다거나, 지난 성탄 선물로 돼지 백과사전을 받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는 영감과 의욕이 돋아요!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친구들과 아페로를 해 볼까 봐요. 친구들이 요즘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져요.


아페로에만 마시는 특이한 술이 기억나요. 프랑스 가족 중에 로항(프랑스 남성, 60대)은 아페로에는 꼭 파스티스를 마셔요. 유리잔에 조금 따르고 물을 부으면 뿌옇게 번지는데, 그 과정을 재밌어 하는 것일까요? 그 많은 재밌는 술을 마다하고 왜 그 술만 마시는지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보려고요. 반면에 식전주건 식사주건 무조건 레드와인을 고집하는 레옹(프랑스 남자, 90대)도 있지요. “장수의 비결? 버터와 와인이지!” 하고는 언제나 헷, 헷, 헷 웃는데 어르신에게 좀 그런 말이지만 정말 정말 귀여우십니다. 조금만 달라고 해도 언제나 와인을 콸, 콸, 콸 따라주면서 말하시죠. “포도주는 건강에 좋으니 많이 마셔라.” 


회사나 모임에서도 아페로는 낯설고 서먹한 사람들이 서로 통성명을 하고 어색함을 푸는 자리기도 해요. 처음에는 맹숭맹숭 서 있던 사람들이 술을 몇 모금 마시고 나면 옆사람과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러다가 테이블 전체가 달아오르는 그 변화를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어요. 하루의 피로가 풀리고 몸과 마음이 나른해지는 그 기분! 저는 이게 아페로가 '끝까지 간다'는 식의 술자리가 아니라, '우린 아페로를 마치고 각자 집에 돌아가 원래대로 저녁을 보낼 거야' 라는 합의 때문이라고 느껴졌어요. (물론 아페로로 달아오른 몇몇이 남아서 클럽까지 도는 것도 종종 봤지만요)



PS

참! 연주가 비빔면 이야기했죠. 저는 프랑스인들에게 오이채를 얹은 비빔면에 화이트와인을 대접한 적이 있답니다. 결과는? 한국인에게 그 소중한 비빔면을 저는 한 젓가락 겨우 먹었어요. 상큼 매콤 달콤한 차갑고 얇은 면요리 한 젓가락에 쌉쌀달콤한 화이트와인 한 모금? 끝없이 들어가죠. 인 기 대 폭 발 이었습니다. 이 글을 마치고 얼른 비빔면 한 대접 비벼야겠어요! 


작가소개 
프랑스 알비의 은성 작가와 한국 서울의 연주 작가, 이들의 공통점은 글쓰기로 최대 출력의 도파민을 얻는다는 것! 쓰는 사람만큼 보는 사람도 즐거운, 도파민 힐링을 선사하는 작가 듀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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