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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n 20. 2018

엄마 등을 발로 차고 싶었던 날-2

우리는 이토록 열심히 성실하게 부지런히 살면서, 감정은 대충 처리한다. 

나는 언제나 '괜찮아요'라고 말하던 어린이였다. 별명은 애어른이었고, 주변 어른들은 딸이 착하고 어른스러워서 좋겠다고 말했다. 삐뽀. 삐뽀. 그건 위험신호다! 당장, 아이에게 물어봐야 한다.


정말 괜찮아? 무엇이든 말해도 좋단다.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단다. 아무도 야단치지 않는단다. 그런 일을 절대 없단다. 


지금이라도 당장 어린 나에게 달려가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분명 어린 나는 무서워서 엉엉 울 것인데 (감정을 바라보는 게 무서워서, 또는 혼날까봐) 그래도 몇날 며칠 몇달 기다려줄 것이다. 쉬지 않고 계속 물어봐 줄 것이다. 정말 괜찮니?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말하면 어른들이 칭찬해 줬기 때문에 엄마가 마음을 놓았기 때문에, 나는 그 외의 감정 표현법을 몰랐다. 


아이들은 미워, 화나, 하기 싫어요, 불편해 같은 말도 배워 나가야 한다. 괜찮다는 말로 다채로운 감정을 덮어버리면, 정말이지 큰일이다. 성장 과정에서 올바른 감정표현을 배울 수가 없다. 성인이 자신의 감정에 알맞은 말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괜찮아요'도 중독성 있는 말 습관이라서 어떤 감정에도 '나는 괜찮다'라고 '대충' 말해버리곤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몹시 안타깝고 안쓰럽다. 



 “엄마. 나는...화가 아주 많이 나.” 라고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화를 낼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화가 난 건 정확히 알았잖아? 감정 상태만이라도 더듬더듬 말했다면,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의미없는 말다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왜 내 느낌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을까. 내 감정의 결을 잘 모르는 둔감함 외에도, 이유는 또 있었다. "너만 힘든 게 아니다"라는 말에 눌려 있었다. 고부갈등은 어디에나 있는 거고 다 지난 일이니 용서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이토록 열심히 성실하게 부지런히 살면서, 감정은 대충 처리한다. 살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 미워서 견디기 힘든 일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스님은 그러더라? “세상이 원래 그러한데 원망을 지니면 마음에 독이 쌓입니다. 당신이 참고 용서하는 순간 그 독이 풀립니다.”      


이런 말에는 ‘세상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너는 그 답대로 행동하라’는 강압이 들어있다. 이런 말을 내면화해서 마음이 기이하게 썩어버린 사람을 나는 많이 보았다. 완전히 틀린 말을 온화하게 잘도 하는 사람들. 우아하게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들. “착한 사람이 참아야지. 어쩌겠어.”라고 엄마를 보듬는 척하던 고모처럼 말이다.   

   


나는 내 맘속 스님에게 ‘바락바락 대들어’보기로 했다. 

아니오. 절대 아닌데요? 남 일이니까 쉬우시겠죠. 원래 그런 게 어딨어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원래 그런 건지’ 누가 정하는데요?        


누구는 새벽 예배를 가고 누구는 책을 잔뜩 사서 읽는다. 누구는 소주를 들이키고 누구는 게임을 한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여전히 용서가 안 되는 일, 미워서 잠이 안 오는 상대가 있다. 견디기 힘든 모멸이 있다. 그런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는 건 쉽지가 않다. 투덜대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두렵고 과거의 상처에 얽매인 사람의 이미지가 생기는 것도 싫다. 그러면 “사는 게 원래 그렇지.”라는 말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래, 사는 게 원래 그렇지.” 순간, 마음이 편한 것도 같다. 손쉽게 해결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자신의 고통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의 편이다. 그들을 지지한다.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불러주고 풀어내는 긴 과정을 견딘 후에야, 진짜 평화가 온다고 믿는다.      


원래 그런 거라는 말? 콧방귀를 뀌어주자. 절대로 믿지 말자. 그런 말은 누가 하는지 정확하게 찾아내야 한다. 찾아서 물어봐야 한다. 보통은 그 고통을 직접 겪지 않는 사람들이 한다. 괴롭히는 쪽, 방관하는 쪽, 혹은 아무 상관도 없으면서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한다. 고통받는 쪽이 아니다.      


원래 그런거다, 용서해라, 좋게 넘어가라, 예민떨지 마라는 말의 남발. 그 속에는 세상에 균열을 내지 말고 분란을 만들지 말며 조용히 입을 다물라는 강압이 들어있다. 그런데 개인이 그런 말을 내면화하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으면? 대충 넘어가면? 질문하지 않으면? 감정은 오히려 배배 꼬여 내면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으면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감정을 섞어먹지 말자. 삼켜 버리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감정에도 삶에도 다양한 결이 있고 다양한 해석이 있어야 하니까. 삶은 복잡한 것이니까, 복잡해서 아름다운 것이니까. 아무리 복잡해도 모든 감정에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굳게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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