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색을 모른 척하며 사는 일, 스스로와 어색한 채로 살아가는 일
‘아, 글씨...’ 적인 성격은 아빠의 충청도 피에서 왔다. 공무원이던 아빠는 ‘종로구청이랑 동대문 구청 중 어디가 낫겠느냐’ 배려 깊은 인사과장의 질문에 “아...글씨...” 하다가, 종로로 가셨다. “동대문 구청으로 가고 싶었는데...”라고 내내 끌탕을 하는 아빠를 보고 엄마가 타박했다.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러자 아빠는 또 그랬다. “아....글씨...”
부정할 수 없이,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 게다가 우리 집 가훈도 ‘속을 보여주지 말 것’이었으니 말 다 했다. 학교 숙제로 가훈을 물었더니 친할머니는 그러셨다. “남에게 패를 보여주면 못 쓴다. 믿을 놈 한 놈 없으니까. 좋아도 좋은 척 안 해야 떡 하나 더 얻어먹는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지금 떠올리니 기분이 ‘오잉또잉’되는 말이지만, 그때는 할머니가 너무 당연한 듯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줄 알았다. 담임 선생님도 내 숙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유전자가 무서운 것이, 스스로 자신을 깨고 변화시키려 노력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가족을 닮아 살게 된다. 이십대 때 나는 딱 가훈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충청도 의뭉스런 아빠 피가 줄줄 흘렀다. 속내를 숨기는 습관은 연애의 초반에 아주 유리했고, 그 사실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던 게 사실. 이십대 때 내가 가장 잘 했던 것은 좋은데 좋은 척 안 하는 거였다. 그거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누가 좋아서 심장 터질 거 같아도 시니컬한 척 할 수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려도 표정만은 무뚝뚝하게. 그게 잘하는 건 줄 알았지, 참 나.
나는 좋아한다는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긍정적 감정에 서투른 인간. 친구에게도 데면데면했다. 그러니 설렘이나 두근거림 같은 연애 감정이 왜 그렇게 불편하던지.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고 못 견디겠는 게 '썸'인 사람이 나뿐이 아니길 바랬다. 차라리 대뜸 연애를 시작해서 안정적인 관계가 되는 게 편했고, 그래서 대충 빨리 서둘러 연애를 시작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밤늦게 만나 술에 취하고 밝지 않은 길을 산책하면 모든 게 금세 시작이 되곤 했다. 알죠? 무슨 이야기인지)
그래도 하루만에 연애를 시작할 수는 없어서, 적어도 몇 주는 뜸을 들여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 도키메키한 기간을 견디지를 못하고 몸을 배배 꼬며 애매한 소리만 하며 시간을 죽였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떠벌떠벌 큰 소리로 별 상관도 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너무나도 아재 같았던 어린날의 나.
그런 상황이 스스로에게 편안할 리 없다. 그래서 누가 좋아지면, 좀 불편해지는 게 당연했다. 나같은 사람들은 불편한 상황이 싫어서 술잔만 연신 비운다. 심지어 “밥 먹을까?”란 질문에는 당황해서 어떻게든 술 시간으로 약속을 잡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어색해서 늘 취한 채 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안쓰럽기도 답답하기도 하다.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려 취해 있다 보면, 그러다 보면 어쩐지 슬퍼졌다. 이내 암담해졌다. 죽을 때까지 맨 정신으로는 솔직해지지도 못할 건가. 나는 대체 왜 이 모양인가.
용케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했어도 상황은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면서 무조건 1주일 1회 만남을 고수하기도 했다. 매일 만나면 불편해질 것 같았다. "거리를 유지하자. 의무감 없는 산뜻한 관계를 유지하자. 외로워도 그게 낫다." 일상 같은 관계, 생활 같은 관계가 가장 두려웠다. 실제의 나, 그 속의 짜증과 신경질, 게으름, 권태, 변덕 같은 부정적 요소들을 연인에게 보여주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도망가지도 못하고 계속 봐야 하는 관계가 되면, 의존하는 관계가 되면 어떻게 하나. 매일 매일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고민했다. "결혼은 절대 하지 말자. 그러면 칙칙한 관계가 되고 만다." 나는 마음에 그런 타투를 도록도록 새겼다.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고 서점에 가면, 거기엔 '나' 외에도 기댈 곳이 많았다. 그래서 쉴 새 없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독일 맥주와 레이먼드 카버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수많은 밴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취향 속에 나를 숨기면 안심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국어 영어 수학만 배우고 감정의 여러가지 결을 배우지 못하면, 나같은 사람이 된다. 나는 세상이 너무도 어색하고 나 자신도 어색해서, 다 그렇게 어색한 채로들 사는 줄 알았다. 어떤 상황에서건 내가 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느낌으로 살았다. 누가 좋아서 설레면 일단 포기부터 했다.
"네가 좋아하는 티를 내면 그는 너를 시큰둥해 할 거야. 그럼? 좋아하는 티를 안 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차라리 그게 낫겠지."
대학교 1학년 때 선배 오빠가 좋아졌을 때 그 오빠가 들어오는 교양과목 강의를 빠지고 방에 엎드려 울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누군가 좋아진 감정만으로 벌써부터 울었다. 슬퍼서 눈물이 나면 "에이, 그렇게 슬픈 건 아닌데 오바하네?"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 감정과 어울려 살지 못하고 늘 겉도는 생활이었다.
내 감정과 겉도니, 남의 감정에 의존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대학 때는 인기 많은 여자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모임에 가건 그 모임의 모든 멤버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상대를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되고) 그들의 모든 속속들이 고민을 내가 알아야 했다. 내가 가장 좋은 상담자여야 했다. 술자리라면 잠옷을 입고 있다가도 일어나서 단장을 하고 나갔다. (그러면서도 너무 성의껏 나온 티를 내면 안되고, 지나가다 들른 척)
매일 매일 누군가를 만났다. 혼자 있으면 안절부절 못했다. 그래서 시도 소설도 에세이도 단 한 장도 읽을 수가 없었다. 책은 둘이서 읽을 수가 없는 것이라서 문제였다. 가끔 혼자 책을 읽어보려고 노력하면 너무도 외롭고 막막해졌다. 책장만 펴면 나와 단둘이 독대하는 느낌, 진공상태의 방에 놓인 기분이 들었다. 국문과 학생에겐 몹시 치명적이었다. 당시 심리검사에서는 타인 의존도가 심하게 높다고 나왔다. "그럴리가요. 언니는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거에요. 성격 좋은 거죠." 후배의 말에 안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나는 그냥 좋은 사람인 거야.
언젠가 친구가 크게 취해 뼈 때리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너 지인 부자잖아. 그 중에 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있냐? 너 그 사람들에게 관심 하나도 없잖아.
그거 모를 줄 알지? 야, 내눈엔 다 보여!
너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야지. 단 한 명이라도 진실된 관계여야지.
네 패 다 보여주고. 좋아하면 좋아하는 만큼 다 말하고. 너 그런 건 무섭지?"
친구 혀가 심하게 꼬여 정확치는 않았지만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아마 그때 그녀는 내 베프였고, 늘 한 발 물러선 듯한 나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상했을 테지. 돌아보니 그녀의 마음을 다 알겠다.
그때는 친구를 간편하게 원망했다. 술 좀 끊어라, 추하다, 주정도 정도껏이야, 이런 말을 어른처럼 써 보내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사실은 알았다. 나는 버림받는 게 무서운 아이였다. 좋아하는 마음을 티내지 않으면, 베프 사이에도 늘 건조함을 유지하면 나는 안전하잖아. 그렇게 느꼈다. 부탁도 안하고 고백도 안하고 먼저 만나자고도 안하고, 늘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고자 했다. 세상에, 친구들에게 먼저 전화를 건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할 말이 없을까봐,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봐 너무 너무 무서워서.
돌이켜 보면 나는 운이 좋아서 달라질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나와 반대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O는 내겐 한번도 없었던 외할머니처럼 다정했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손에 땀이 나도 놓지 않고, 언제까지고 잡고 있는 그런 바보같음이 있었다. 늘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멍멍이 같았다. 자다가 악몽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뒤에서 껴안으면 자기도 자고 있으면서도 팔을 끌어당겨 보듬어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도 싫고 세상도 싫고 다 싫어서 만취를 해 버려서 길에서 토하면 핀잔 한 마디 없이 맑은 물을 사다주었다. 다음날 아침엔 하얗고 말그레한 쌀죽을 끓여 주었다. "술 냄새가 나서 입은 못 맞추겠다" 농담을 하면서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그러면 왈칵 울음이 났다. 머리칼을 빗어주었다. 그러면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너 말고는 다 싫어."
따뜻해서, 무서웠다. 같이 있다간 느긋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러면 인생에서 실패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쳐 버렸다.
사랑을 표현한 만큼 돌려줄 줄 아는, 내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고 고마워하는, 내가 아무리 사랑해도 떠나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인생은 수월해진다. 불안하지 않게 된다. 사랑을 믿게 된다. 연애가 끝난 후에도 그 믿음과 안정감만은 내 안에 남았다.
관계는 끝났지만, 그를 따라했던 습관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내 것이 되었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준 연인 덕에 소중함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가 엄마를 따라하듯, 연인이 내게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서 했다. 그건 사랑이 한 일이었다. (상투적 표현이라 저어되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힘이었다.
누가 좋으면 미리 가서 기다렸다. 좋아하는 티가 나든 말든. 누가 보고 싶으면 문자를 보냈다. 재치있는 표현은 생각도 나지 않아서 그냥 직선으로 말했다. "네 생각이 났어." 헤어짐이 아쉬우면 '한번 안아줄게'라고 말했다.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그렇게 했다. 서로 안고 있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었다. 안전한 기분이 들었고, 세상이 조금 덜 미워졌다. 약 50센티미터 정도의 안온함. 그건 모두 O가 내게 해주었던 것이었다. 그의 그 촌스러운 사랑 표현이 좋아서 따라하고 싶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아직도 그리 능숙하지는 않아서 누가 좋으면 자꾸 먹을 것을 준다. 여전히 세련되고 다채로운 방법을 알지는 못한다.
웃을 일이 많아졌고 울 일도 많아졌다.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니 빗방울도 들이치고 거센 바람이 불기도 했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같은 것만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내버려 두었다. 다시 창문을 닫으면, 또 매순간 어색한 채로 살게 될까봐 싫었다.
오래 전엔 좋아하는 만큼 모두 티내면 바보가 되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바보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느새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친구가 아주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친구 중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금이 좋고, 행복하다. 그래서 계속 노력하고 싶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노력하면, 나도 O처럼 정많은 외할머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