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두려움을 코미디로 쓰니 치유가 됐다 <1>

상사를 코미디 캐릭터로 만들어 버렸다. 치유가 됐다.

by 소은성

괴로움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퇴사 후의 일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는대도 쓰고 싶어 미칠 것 같았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에 타서 노트북으로, 혹은 걸으면서 핸드폰에 썼습니다. 2호선 구로디지털 단지에 위치한 비0와 상0 문제집 회사를 뛰쳐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동남아 휴양도 살사클럽 등록도 아니고 책상에서 글을 쓰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지루한 곳에서 나와 다시 지루한 책상물림이라니.


무언가 쏟아낼 것이 많아 마음이 무거우니, 어디로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직장생활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상사를 소재로 에세이를 써서 독립 잡지에 기고했습니다. 원고료도 없었고 마감도 없었는데, 기어코 써낸 것이 돌이켜보니 놀랍습니다. 책상을 떠나는 시간이 아까워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울 정도로 집중해서 그 한 편을 완성했던 기억.


돌이켜보니, 셀프 심리상담이었던 듯 합니다.


첫 회사 생활은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고교생들을 위한 잡지 콘텐츠 기획자로 시작했습니다. 니체,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의 철학서와 광고, 음악, 영화 등의 문화콘텐츠를 접목한 텍스트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나의 첫 상사는 꽤 특이했습니다.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키 180cm의 사십대 남자였습니다. 툭하면 둥그런 눈을 양쪽으로 굴리며 협박을 해댔습니다.


“표절 조심하세요. 표절! 은성 씨 글이 표절이 아닌가 늘 의심됩니다. 제 촉이 맞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이 안 좋아요. 표절하시면 회사 다 망하는 거예요!"

가끔은 보스에게 다가가 긴밀하게 속삭였습니다.

"쟤가 표절하는지 아닌지 잘 지켜보세요."

(이 상사를 편의상 일단 '부릅씨'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퇴사를 한 뒤 출근을 하지 않게 되니 낮에는 산책을 했습니다. 그런데 횡단보도 건너편에 부릅씨가 있는 게 아닌가요. 키도 딱 그만큼, 3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각진 스포츠 머리, 늘 안절부절하는 표정. 어깨에 딱 붙여 매는 검정색 백팩까지 완벽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일산 신도시에 저 사람이 왠일이지.


어깨를 펴고 앞으로 걸었습니다. '아니구나.' 그제야 숨이 쉬어졌습니다. 그와 비슷한 체구와 복장을 한 한국남자는 쌔고 넘쳤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났습니다. 언제까지 기절할 것처럼 놀래야 하는 걸까. 슬퍼졌습니다. 회사 문을 나오고서도 쌓인 공포와 분노는 해소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글로 써버리기로 했습니다. 지금 보면 어설픈 글이지만, 그때는 쓰는 행위에 몰입되어 필력을 따질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떤 글쓰기는 그렇게 절박하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낫게 하기 위한 글쓰기는 인간의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부릅씨에 대한 글은 한달 뒤 인쇄되어 독립잡지 형태로 집으로 배송되었습니다. 작은 잡지를 한손에 움켜쥐니, 눈부릅씨가 쭈그러드는 느낌이 들어 통쾌했습니다.

"이봐. 자네가 아무리 나에게 눈을 부라려봤자 여기서 우스운 캐릭터나 되는 존재라네."



''악마는 니체를 읽는다' 라는 제목으로 퍼블리싱되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어요.

https://blog.naver.com/purplewater/20128042698



과거의 트라우마를 글로 쓰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기억이 너무 괴로우면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통째로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부릅씨가 한 구체적인 대사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편집장 미란다의 대사를 패러디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널 왜 뽑았는지 알아? 난 항상 똑같은 애들을 고용했었어. 머리 좋고 야무지고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한 그런 애들. 그런데 종종,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그런 똑똑한 애들은 성실성 면에서 날 조금 실망시켰지. 난 그래서 뭐랄까...좀 모자란 애들은 우직하기라고 할 줄 알았지.”


놀랍게도 패러디 대사를 쓰는 동안 소스라치게 모든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의도적으로 기억을 삭제했었구나, 깨달았습니다. 반년째 세번이나 직원이 바뀌었는데, 그 직원들은 직장나보다 두 세배 속도의 집필 속도를 지녔다고 그가 늘 말했었던 기억을요.


퇴사하기 전 "부서 안에 내 편이 필요해서 너를 뽑았는데, 네가 배신을 해?”라고 말했었던 것을 또 깨달았습니다. 그가 나의 글 실력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내 순박함이 마음에 들어서 채용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나에게 폭언을 퍼부을 때마다 내가 그의 입가 거품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는 것까지도 떠올랐습니다. 문장으로 쓰기 전에는 회피하던 사실들이 고스란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자니, 놀랍게도 쾌감이 들었습니다.


쓰다 보니 흥이 돋았습니다. 상사는 회사 직원들이 꺼리는 사람 1위였는데,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루는 탕비실에 에이포 용지 가득 부탁의 말씀이 씌어 있었어요.

"커피잔을 닦는 곳입니다. 제발 몸은 각자 집에서 씻어주세요"

부릅씨는 출근마다 13층 계단을 걸어오르는 건강한 습관이 있었고, 건강해서 땀도 많았고, 그 땀을 탕비실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로 닦았다는...목덜미도 겨드랑이도...이 이야기는 차마 글에 담지는 못했습니다.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오해받을까 봐요!


(저의 옛 사원증을 걸고 100%진실입니다)


(2부에서 계속)




<필자 소개>

문제집 출판사에서 꾸부정하게 지내다가 돌연 퇴사를 선언하고 나와서 기자가 됐습니다. 십 년 동안 프리랜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인터뷰를 가장 좋아했고, ktx매거진, 대한항공 기내지 등에 여행기사를 기고했습니다. 글밥 아카데미에서 7년 동안 성인 대상으로 글쓰기를 지도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여성전용 작업실 씀씀에서 여성전용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자기 표현적 글쓰기, 논픽션 쓰기 코칭에 집중하는 중입니다.

서울 마포구성산동에서 남프랑스 출신 농부 남편과 유기묘 출신 고양이와 함께 삽니다. 남편이 경기도 고양시 친환경 농장에서 기른 유기농 채소를 ‘소잎’ 브랜드로 동네 사람들에게 팔고 있습니다. 잠에 굉장히 집착합니다. 좋아하는 문장은 “밥 먹고 더 자라.” “졸리면 자고 해라.” 싫어하는 문장은 “잠은 죽어서도 잘 수 있다”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가야 된다.”


무엇이든 쓰게 됩니다. 매일 쓰면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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