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8
덕 분에 이렇게 행복한데
질 릴리가 있나요?
덕질의 정의라고 알려진 덕후들의 용어.
덕질을 하는 사람은 뭘 해도 해낸다. 그 열정은, 어느 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것임을...
덕질 연대기의 시작은 세븐오빠였다. 라테는 말이야. 세븐이 타고 다니던 힐리스와 선캡모자가 없으면 아싸의 길을 걷는 그야말로 세븐의 시대였다. 내 발에 문신템처럼 존재하던 힐리스...
세븐 팬클럽 이름은 ‘럭키세븐’ 이였다. 세븐을 실제로는 SE7EN으로 표기했다. 1기 신청은 놓쳐 2기에 등록을 했다. 이후 모든 팬 활동의 준거지가 된 다음 카페가 처음응로 팬카페의 준거지로 급부상하던 시기였다. 세븐의 팬이 된 것이 나의 덕질의 시작이었다. 앨범과 고가의 포토북을 사 모았다. (나중에 동생이 중고나라에 알뜰살뜰 다 팔아주었음.) 다행일지 불행일지 아빠는 나의 덕질에 적극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이해받으며 성장한 줄 알았는데 덕질만큼은 아빠가 이해해 줬다. 이해를 넘어서 지지해 주었던 기억.
세븐 노래는 최근 들어봐도 음악적으로 훌륭하다. R&B 계열의 노래로 아이돌과 같은 인기몰이를 한 것은 세븐이 유일무이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와줘’나 ‘열정’ 같은 노래 말고도 거미가 피처링한 ‘안녕’ , 앨범 수록곡 ‘꽃을 들고서’와 같은 노래를 정말 강추한다. 호찌민에 와서 세븐의 수록곡을 아는 친구를 만나 어찌나 반가웠던지 친구란 만취 해서 그랩에서 고래고래 세븐의 수록 노래 부르며 귀가한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초등학생의 마음은 제법 갈대 같은 것으로... 곧이어 등장한 대형 신인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그 대형신인이 누구냐면...
바로 동방신기다.(5방 신기)
90년대 초중반 생들 중 동방신기 팬이 아닌 자를 찾는다면 그건 아마 SS501 팬이었을 확률이 높다. 당시 경쟁 그룹이었으나, 경쟁이라고 하기에 동방신기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우리 모두가 동방신기의 팬이었다. 이수만 아저씨는 모든 것이 완벽한 5명의 오빠들을 아이돌 시장에 내놓았다. 실제 키, 외모, 노래, 춤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웠는데 지금까지도 전무후무 하다고 생각한다. 뚝딱이와 음치가 없는데 다 키가 크고 잘생긴 아이돌이라...
데뷔곡 'HUG'는 동방신기가 '아카펠라'를 하는 아이돌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노래이다. 마딘은 우유, 네 방의 침대 등 맞춤법을 정확하게 지킨 발음과 조화로운 화음과, 교복 같은 의상과, 충격적인 비주얼까지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덕질의 특징이라 함은, 내 가수의 자존심이 나의 자존심이며 타 아이돌 팬들에게 자동으로 적개심을 품던 때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도 H.O.T. 의 팬과 젝스키스 팬이 기싸움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동방신기는 2세대 아이돌로 1세대보다는 팬 문화가 성숙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턱 없이 부족한 부분이 많았던 때이다. 늘 경쟁 그룹과 그 팬을 경계했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데 원래 그런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덕질인 것이지요.
이렇게 가수를 사랑할 수 있나 싶을 만큼 카시오페아(당시 동방신기 팬덤 이름) 활동을 열심히 했다. 당신들은 아시나요. 다음 카페 회원수 80만에 육박하던 동방신기 팬 카페 ‘유애루비’를... 동방신기는 그런 존재였다. 80만 카페는 흔하지 않았다. 그 카페는 내가 숨 쉴 구멍이었다.
피 터지는 티켓팅으로 콘서트도 가고 악수회도 가고 앨범을 사모았다.(이것도 동생이 나중에 중고시장에 팔아주었음.) 팬덤 활동에는 지금은 없는 팬덤 내 작은 서클(?)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당시 영웅재중을 가장 좋아하던 나는 영웅재중 개인서클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디자인하고 포토샵으로 무언가 사부작 만들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거기서 무언가 만드는 담당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학교, 학원을 마치면 집 컴퓨터로 가서 유애루비에 접속해서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글, 짤 등을 모으는 것이 일상이었다. 공부하기도 바쁜 시간에 그 짓(?)까지 했으니 참 그때부터 바쁜 인생을 살았구나 싶다. 그 열정으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를 갔겠다는 뻔한 유행어까지 들었던 사람이 바로 나이다. 엄마는 동방신기고 나방신기고 네 인생에 뭐가 도움이 되냐고 했다.
내가 말했나. 나는 은근 이성적 인간이다. 끝을 내야 할 때는 끝을 낸다. 동방신기 덕질의 끝은 명확하게 '공부' 때문이었다. 공부를 하려면 덕질을 할 수가 없었다. 둘 다 병행하는 사람들도 있다만, 나는 그 정도 두뇌는 안되기에 자연스레 동방신기의 덕질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덕질을 그만두고 몇 년 후에 동방신기가 계약문제로 공준분해 될 때는 아무래도 내 일 같이 마음이 아팠다. 이수만 아저씨 욕하는 건 당연했고.
동방신기의 곡이 명곡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중에서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바닥부터 시작해서 성공한 과정 속에 있는 일본 노래들을 진짜 추천한다. 그 노래를 한국어로 내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었다. 그들은 전무후무한 갓벽 아이돌이다.
그렇게 덕질을 그만둔 효과(?)로 인해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덕질하기에 재밌는 것이 넘쳐났다. 그렇게 나는 덕질이 어릴 적 잠시 지나가는 놀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나의 도파민과 넘치는 추억을 담당해 준 세븐오빠와 동방신기오빠들에게 새삼 감사하며...
그러나, 혹시 이런 말을 아시나요?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
때는 2013년 큰 시험을 앞둔 해였다. 그 해에는 놀던 모든 것을 관두고 공부에 매진하는 고시생의 생활을 해야 했다. 가요를 듣기보다는 민요와 동요를 이어폰에 끼고 악보까지 외우던 그 시절이었다. 그러나, 2013년에는 또 다른 대형 히트곡이 탄생한다. 그 노래는 바로... <으르렁>
엑소의 으르렁은 그야말로 중독성 강한 춤과 멜로디로 대중성까지 모두 겸비한 노래였다. 엑소의 존재감을 세상에 명확하게 드러낸 곡이다. 그 앨범의 전체적인 비주얼 디렉팅을 그 유명한 '민희진'이 맡았다. 교복을 입고 등장한 엑소 오빠들 아니 '친구'들은 아이돌의 명가 SM 답게 잘생겼고 노래를 잘했다. 고시공부로 지친 나에게 엑소의 으르렁은 도파민 그 자체였다. 이제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엑소를 덕질했다. 공부를 끝내고 으르렁 무대를 보면서 잠드는 것이 낙이였다. 나의 공부 도피처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코 앞둔 시험 이슈로 깊은 덕질의 길을 걷진 못했지만 역시 탈덕은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일 뿐이었을까 하는 덕질이 끝난 줄만 알았는데 더 진심으로 덕질을 한 일이 있었으니..
2편에 이어서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