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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일기

tournESol #2 순례길, 포르투갈길

by 솔글


순례자의 하루는 단순하다. 매번 같은 루틴은 아니지만 순례자 일기를 써보는 오늘


기상.

순례길 초반부에는 순례길에 대한 나만의 루틴이 없고, 쉬엄쉬엄 걷는 것이 목표였기에 8시까지는 충분히 자고 걷기를 시작했다. 포르투갈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은 바닷바람이 강해 시원해서 오후에 천천히 걸어도 괜찮았다. 그래서 8시에 눈을 뜨면 천천히 준비해서 9시쯤 걷기를 시작했다. 보통 알베르게들은 9시 이전에 체크아웃을 해야 하기에 나처럼 이렇게 늦게 걷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눈을 떴을 때, 알베르게의 침대들에는 나 빼고 떠난 사람들의 흔적만 있었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걷기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륙길로 들어선 이후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스페인의 더위는 무서운 수준이였고 때문에 반드시 1시 이전에는 걷기를 마쳐야 했다. 그래서 6시 때로는 5시 반부터 걷기를 시작하였다. 당연히 이른 새벽은 어둡고 길에는 아무도 없다. 솔직히 무서운 마음이 들어 다른 순례자들이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옆에서 쫓아 걸어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새벽공기가 약간 서늘한 그 시간에 길을 걷는 것은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시간 같았다. 일찍 일어나는 새에게는 늘 뿌듯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아침식사.

IMG_2155.HEIC 아침 먹은 카페 중에 가장 좋았던 곳!

그렇게 이른 시간부터 공복상태로 걷다 보면 배가 고프기보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진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커피도 술도 참으로 실컷 마셨다. 둘 다 마시지 않았으면 좀 더 클린 했으려나 싶지만 마시는 모든 순간들이 행복했으니 그냥 넘어가자. 아무튼 나는 머무는 마을을 고를 때, 큰 마을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마을을 고르는 편이었다. 처음 묵는 알베르게가 라브로제라는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였는데 너무 평화롭고 한적해서 알베르게에 있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도 큰 마을 가기 전에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로 가서 숙박을 했다.

작은 마을에서 숙박을 마치고 나서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으면 큰 마을에서 아침식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 루틴이 참 좋았다. 5~7km 정도를 걸은 후 먹는 커피와 빵 또는 아사이볼이나 요거트볼은 세상 꿀맛이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그곳에 들러 아침을 먹으며 쎼요(스탬프)도 찍는다. 내가 순례길을 걸으며 가장 좋아했던 시간 중 하나인 아침식사 시간.


오전걷기.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에너지가 차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도 마셨고 탄수화물도 채웠으니 당연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간이 가장 스퍼트를 내서 많이 걷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이 시간 동안 드는 많은 생각들은 보통 긍정적이고 밝은 미래에 관련된 생각들이었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결국 마음의 상태는 몸의 상태에 참 많이 달려있다는 것을. 화가 나고 슬플 때는 운동을 하고 잘 챙겨 먹자. 그러면 기분은 나아지게 되어 있다. 씩씩한 걸음과 함께 오늘은 왠지 30km 정도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큰 착각을 하는 그런 시간이 오전 걷기 시간이다.


점심식사.

그렇게 열심히 걷다 보면 다시 배가 고프다. 상황에 따라 점심식사 즈음 걷기를 마치는 날도 있었다. 발목 부상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10km 내외를 걸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은 점심을 먹고 조금 더 걸었다. 점심식사를 먹을 때는 배가 많이 고픈 상태가 된다. 커피와 작은 빵을 먹고 기세를 몰아 걸었기에 당연히 허기가 진다.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 고물가의 유럽 + 유로 환율 1600원대 시대에 식비로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게 될 위기에 봉착하게 되므로. 그러나 순례길에는 순례자 메뉴를 판매하는 경우가 많다. 10유로~15유로 사이의 돈을 지불하면 샐러드부터 메인, 디저트 그리고 드링크까지 코스로 제공하는 메뉴이다. 순례자 메뉴가 있을 때는 거의 무조건 순례자 메뉴를 먹었고 아닐 때는 현지 음식을 먹었다. 그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메뉴는 문어요리 뽈보나 해물밥 정도였다. 고작 3일째가 되었을 때부터 김치찌개라던지 삼겹살구이라던지 각종 한식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순례길에는 큰 도시가 없기 때문에 한식당은 없다.

이 시간에 종종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특히 스페인에 들어서고 난 후에는 거의 끌라라를 마셨다. 끌라라는 스페인 레몬환타와 맥주를 1:1로 섞은 음료인데 레몬의 나라 스페인에서 내가 좋아하는 상큼한 레몬과 맥주의 조화는 그 어떤 음료보다 최고의 맛을 낸다. 끌라라는 최고의 에너지 음료였다. 나중에는 끌라라를 사 먹는 돈이 아까워서 내가 직접 조제까지 해서 먹었다.

IMG_4216.jpg 가장 훌륭했던 순례자메뉴 코스!


오후걷기.

점심을 먹은 이후로는 에너지를 얻기보다는 점점 체력이 고갈되고 더위가 시작되기에 짧은 거리가 남았음에도 참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구간이다. 이때부터는 다리를 거의 질질 끌고 가는 수준이 되며 머릿속에는 각종 부정적 생각으로 가득 찬다. 도대체 나는 이 길을 왜 걷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까지 내 안의 모든 부정 기운이 올라오는 기분이다. 게다가 더위는 어찌나 더운지 가끔은 눈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도 있었다. 어깨 허리 발목이 아프기 시작하고 발에는 감각이 사라진다. 최악의 구간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알베르게까지 걸어서 30분 정도가 남았을 때이다. 지금 건 4-5시간을 걸어왔고 고작 30분인 길인데 그 시간은 300분 이상으로 느껴진다. 차로 가면 10분도 안 걸릴 그 거리를 내가 왜 이렇게 더위와 싸워야 하는가 하는 불평이 올라온다. 온갖 핑계를 대며 대중교통을 찾아본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소도시에는 대중교통이 없다. 그러다가 진짜 힘들 땐 우버 볼트를 검색한다. 역시나 지원되지 않는 구간들이 대부분이다. 종종 히치하이킹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실행에 옮기기엔 세상의 흉흉한 일이 많고 용기도 없었지만.


도착.

30분이면 갈 거리를 거의 45분 만에 도착한다. 알베르게에 오면 당장 눕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일단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순례자 여권에 쎄요도 찍고 알베르게 사용법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도 듣는다. 침대를 배정받고 앞, 뒤, 옆, 위 침대를 사용하는 순례자들과 인사도 나눈다. 역시나 아시안은 늘 나 혼자였다.

땀범벅이 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면 빨래를 해야 한다. 배낭에는 고작 한두 벌 밖에 여분이 없기에 그날그날 빨래를 하지 않으면 입을 옷이 없다. 그래서 빨랫비누로 빨래를 하고 알베르게 마당에 옷을 건조한다. 침구를 깨끗하게 세팅해 주는 알베르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침대에 내 침낭도 펼쳐두고 혹시 모를 배드버그 방지를 위해서 시나몬 스틱도 배게 맡에 둔다. (그러나 결국 배드버그에 물렸다.)

하루가 한참 지난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을 마치고 하면 3시에서 5시 정도 사이의 시간이 된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잠들 것 같기도 하고 실내에 누워있기에 정원이 멋진 알베르게들이 참 많았다. 정원에 앉아 있다 보면 건조한 유럽 날씨에 머리카락도 금방 마른다. 책을 읽거나 영상을 만들거나 해먹에 누워서 짧은 낮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거나. 어쩌면 이 시간을 위해 걸어왔던 걸까 하는 행복한 시간. 나중에는 이 시간이 소중해서 정원이 멋진 알베르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IMG_4215.jpg 캐롤리나의 알베르게는 내가 머문 곳 중 가장 좋았다!



저녁식사.

오후에 점심식사를 항상 넉넉하게 해서 인지 너무 힘들어서 입맛이 없어서인지 저녁식사는 간단하게 해결할 때가 많았다. 인내심의 한계가 올 때는 배낭 안에 넣어둔 컵라면을 꺼내 먹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저녁식사는 복숭아였다. 나는 복숭아를 참 좋아하는데 유럽은 복숭아 종류도 다양하고 당도도 참 높다. 그래서 종류별로 사 와서 맥주랑 먹거나 물보다 싼 와인을 살 수밖에 없기에(?) 와인 와 복숭아를 먹기도 했다.

순례자들이 많고 서로 가까워진 날에는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도 했다. 5~10명 순례자들이 모이면 거의 국적이 모두 다 다르다. 이 시간에는 서로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은 순례자들이 많았다. 역사에 대해서도 궁금해해서 한국전쟁부터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한국 술에 대한 관심이 꽤 많았다.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는 다른 글 주제로 한번 더 써보려고 한다. 아무튼, 서로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 순례길에 왜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이때 일반화 하긴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서양인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은 동양인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참 많은 영감과 깨달음과 생각의 전환을 얻었다.

IMG_2223.jpg 최고는 컵라면이었어.

취침.

다음날 새벽같이 출발하는 기에 10시 이전에는 모두 잠을 자는 분위기이다. 일반적인 게스트 하우스들처럼 술을 늦은 시간까지 마시거나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잘 없었다. 그렇게 어떠한 소음도 없는 조용한 알베르게에서의 밤을 맞이한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많은 것을 채웠기에 내일 걸을 힘을 다시 얻는다.



거의 2주의 시간을 매일 이렇게 보내었다.

이렇게 단순한 하루가 참 좋았다. 무엇을 보거나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오롯이 걷기 하나였다. 이렇게 단순한데 행복할 수 있다니 어쩌면 단순해서 행복했던 것일까 싶지만. 순례자의 하루는 이토록 단순하지만 고되고 그래서 행복한 길이다. 또 갈 기회가 생기길 간절히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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