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2025 낫저스트북클럽 2월의 책

by 황은솔

가만히 쓰다듬는



요즘은 걸음마를 하기도 전부터 어린이집에 가는 경우가 많지만 제가 어렸을 적엔 한국 나이로 여섯 살 전까진 집에 있다가 유치원에 가거나, 유치원도 아예 다니지 않고 여덟 살에 국민학교,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게 보통이었어요. 90년대 초에는 드물게도 제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돌봐줄 다른 보호자가 없었기에 저는 네다섯 살부터 지금의 어린이집 격의 역할을 했던 미술학원을 다니다 여섯 살부터 유치원에 가기 시작했어요.


미술학원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저는 굉장히 내성적인 아이였어요. 동네 친구들과 놀 때는 골목을 호령하던 씩씩한 어린이였는데 이상하게 등원만 하면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물을 마시고 싶어도 선생님께 말을 못 하게 되었죠. 미술학원에 다니던 시기에는 그때 학원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고, 그걸 떠나서도 어쨌든 어린 나이였으니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못 해 바지에 실수를 해도, 준비물을 못 챙겨 왔는데 빌릴 용기가 없어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선생님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유치원에 가자 상황이 바뀌었어요.


당시의 지방 도시에는 지금의 대도시처럼 동네마다 유치원이 있는 게 아니었어서 동네 친구들이 아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어야 했어요. 미술학원의 언니 오빠들도, 뭐든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던 원장 선생님도 없었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으니 화장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말문을 여는 건 힘들어했어요. 얼마 안 가 문제가 터졌어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봄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어렵게 용기를 내 친구들과 대화를 하던 중에 개구진 한 아이가 제 목소리가 남자 같다고 소리쳤어요. 기껏해야 만으로 너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이 생각 없이 주고받는 장난이었을 텐데, 어렵사리 말문을 튼, 마찬가지로 만으로 네 살이었던 저는 그날부로 졸업할 때까지 유치원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어요.


하루는 저녁에 집에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어요. 설거지를 하던 엄마는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고, 저는 신이 나 잽싸게 여보세요, 하고 수화기를 들었죠. 엄마는 터울이 큰 육 남매 중 막내인 데다 결혼이 늦었던 편이라 외사촌 언니 오빠들은 당시 모두 성인이거나 중고등학생이었어요. 그중 제가 제일 좋아했던 큰 외삼촌네 사촌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언니야, 언니야, 하면서 종알종알 말을 하는데 언니가 이상해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듣고만 있어요. 언니야, 언니야, 하고 부르는데 언니가 이상한 말을 해요. 은솔아, 개나리반 ㅇㅇㅇ 선생님이야.


아무 말도 안 하고 수화기를 붙잡고 있으니 엄마가 다가왔어요. 엄마에게 수화기를 넘겨주었고, 몇 마디 통화를 하던 엄마는 전화를 끊고는 아무 말도 않고 다시 설거지를 하러 갔어요. 저도 별생각 없이 하던 일을 했던 것 같아요. 다음 날 비슷한 시간에 전화가 또 울렸어요. 이번에도 엄마는 설거지 중이었고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어요. 수화기를 들었더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촌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어요? 언니야, 하면서 또 미주알고주알 별별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언니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요. 언니야, 언니야? 은솔아, 오늘도 선생님이야.


엄마는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선생님과 통화를 하고는 전화를 끊고 저를 돌아보며 앉았어요. 저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무서워 눈물이 났어요. 선생님보고 언니야,라고 부른 게 혼날 것 같았거든요. 엄마는 저를 가만히 안아주며 유치원에서 말하는 게 싫으냐고 물어보았어요. 집에서는 수다쟁이인 막내딸이 등원 후엔 한 마디도 잘 못 꺼내는 아이였다는 걸, 아마도 엄마는 그제야 알게 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선생님과 말을 맞추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 제가 받게 했던 거죠. 그때는 그런 걸 꿈에도 모르고 저는 그냥 울기만 했어요. 뭔가 잘못한 것 같았거든요. 엄마는 내내 안고 등을 쓰다듬어주었어요.


그날 이후로 선생님은 가끔 저녁이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고, 가족 중 누가 받더라도 제게 바꿔 주었어요. 사촌 언니인 줄 알고 또 수다쟁이 본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고 선생님이란 걸 눈치채고 한 마디도 못하고 전화를 끊을 때도 있었지만, 엄마 아빠도, 선생님도, 저를 혼내지는 않았어요.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저는 지금 서점을 운영하는 어른이 되었어요.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말로 설명하는 것이 직업이 되었어요. 그전에는 발표가 일상인 학문을 공부했고, 크고 작은 행사를 주최하고 진행하는 직업도 가졌어요. 제 친구들은 제가 엄청난 수다쟁이란 걸 알고, 처음 만난 손님들과도 쑥스럽지만 즐겁게 대화를 나누어요. 친구들이나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면 정말 깜짝 놀라겠죠?


껍데기가 깨어지기 전에는 아무도 몰라요. 그 안에 어떤 씨앗이 들어있는지요. 어른의 마음에도 씨앗은 계속 자라나요. 나의 과거가 지금이 아니듯 당신의 지금이 반드시 내일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등을 쓰다듬어 주었던 엄마처럼, 이 한 권의 그림책이 당신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기를 바라요.



책 읽는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낫저스트북클럽

2025년 2월의 책, 조던 스콧 , 시드니 스미스의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