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물건의 모양을 확인해 본 적이 있는가. 손을 휘져으며 물건을 둘러싼 빈 공간을 확인한다. 물건의 위치를 확인했다면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요철을 확인할 것이다. 어떤 곳은 튀어나와 있지만 어떤 곳은 움푹 들어가 있을 것이다. 튀어나온 곳 확인은 쉽다. 손과 손끝의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양의 자극이다. 반면 움푹 들어가거나 예리하게 들어가 있는 흠집은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다. 감각을 양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음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민감도가 낮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물건의 모양을 파악할 때는 튀어나온 곳보다 움푹 들어가 있는 부분의 확인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자아성찰도 마찬가지다. 주관의 눈을 감고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물건의 형태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 자신의 장점, 자랑스러움 등은 요철의 튀어나온 부분처럼 쉽게 확인된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있는 흠집과 움푹 들어가 있는 내면의 상흔은 온 신경을 써가며 확인하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렵다. 손끝에 전달되는 비어있는 감각은 음의 자극이고 공허이다.
각오를 하고 온신경을 쓰며 샅샅이 뒤져보려 하여도 쉽게 흠결을 지나치게 될 것이다. 부끄러움을 덮고 싶은 방어기제도, 잊고 싶은 상처도 있을 테니까.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노력은 그래서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아픔과 부끄러움을 이겨나가기 어렵기에 자아 성찰을 이룬 사람이 훌륭하다 박수를 받은 것일 게다.
쉽게 내뱉어진 반성의 말들에는 힘이 없다. 반성을 위해서는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을 알기 위해서는 자아성찰을 전제로 한다. 자아성찰을 건너뛰고 나온 반성은 의미가 없다. 아니 처음부터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자아성찰을 요구하는 것과 진배없다. 불가능한 요구인 게다.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글들을 보곤 한다. 그런 요구를 하는 이들의 편을 들어주고 싶지 않은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한다. 그들도 반성이란 게 자아성찰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진심 어린 사과 같은 것을 바란게 아니라는 삐뚤어졌다 비난받을 마음이 든다.
범죄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그들은 지금 반성하고 있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사과를 하고 타원서를 요구하기도 한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그들이 그 짧은 시간에 자아성찰을 할 수 있던 사람일까? 그런 현자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래서 그들의 반성과 사과, 주변인의 탄원을 신뢰하지 않는다. 용서도 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충분히 자아 성찰을 하고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의 죗값을 모두 치르고 난 후 그 후에 사과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