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문 앞에만 서면 나는 다시 초등학교 5학년이 된다. 전교생 앞에서 머리가 하얘지고 얼어붙었던 그때로 돌아간다. 열다섯 해가 지났는데도 그때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스무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순간 머릿속은 한겨울 눈밭처럼 하얗게 비워졌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목소리를 타고 올라왔고, 시선은 마치 납덩이를 매단듯 바닥으로 꺾여버렸다. 시간이 늘어지고, 소리가 멀어지고, 현실이 희미해졌다.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오늘의 악몽을 복기했다. '김 사원, 발표는 청중을 보면서 하는 겁니다.' 팀장의 날카로운 지적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사람들이 날 얼마나 한심하게 봤을까.' 회의실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품하는 과장님, 한숨 쉬는 팀장님, 옆자리 동기의 답답해하는 눈빛까지.
바로 그때였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이마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마치 알에서 깨어나듯, 그 틈으로 15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존재가 기어나왔다. 완벽한 양복 차림에 주머니엔 빨간 펜까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것처럼 깔끔한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의 피드백 요정입니다."
나는 웃음이 터졌다. 술에 취했나 싶어 맥주캔을 확인했다. 아직 두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다.
"저는 사회 초년생들의 성장을 돕는 특별 교관이에요. 제가 한 달 동안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에 피드백을 해드리겠습니다. 특히 발표는 제 전문 분야죠."
요정은 책상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러곤 마치 TED 강연자처럼 당당하게 서서 말을 이었다. "보세요. 키가 작아도 시선은 당당하게, 목소리는 또렷하게. 중요한 건 겉모습이 아니라 메시지예요. 제가 바로 그 비결을 알려드리죠."
'쥐 콩만한 게 뭘 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12점입니다." 요정이 펜을 똑똑 튕기며 말했다.
"네?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마음속 말도 다 보여요. 방금 절 쥐라고 하셨죠? 그것도 콩만한 쥐라고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죄송해요."
"사과는 +2점. 하지만 여전히 마이너스네요. 이렇게 매번 지적하는 사람의 외형이나 지위를 탓하다가는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텐데요?"
"계속 팀장님을 원망하셨죠? -3점입니다."
"왜요? 내가 뭘..." 목소리가 작아졌다.
"자기방어와 회피, -5점이에요.
"그쵸... 제가 못했죠." "자책은 -8점입니다.
"하..." 입을 다물었다.
"침묵으로 회피 -3점. 이러다간 다음 발표도 똑같을 텐데요?"
요정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패턴이 늘 반복됐다. 지적 받으면 상대방을 욕하거나 스스로 위축되고, 그러다 완전히 주눅 들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처음으로 솔직하게 물었다.
"와, 벌써 +5점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죠."
2주가 지났다. 요정과 함께 발표 연습을 했다. 거울 앞에서, 카메라 앞에서, 심지어 우리 집 고양이 앞에서도 발표를 했다. 처음엔 고양이 앞에서도 떨렸다.
요정은 주머니에서 작은 거울을 꺼냈다.
"이 거울을 한번 보세요. 지금 당신은 거울에 묻은 작은 얼룩만 보고 있어요. 하지만 보세요, 거울 전체는 여전히 선명하게 당신을 비추고 있잖아요. 당신의 가치는 한두 번의 실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요정은 내 발표 영상을 틀어놓고 장점을 짚어주기 시작했다.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가 친근감을 준다고, 목소리 톤이 차분해서 신뢰감이 있다고.
3주차에 새로운 발표 기회가 왔다. 요정이 어깨 위에 앉아 계속 점수를 매겼다. 이번엔 달랐다. 시선은 청중을 향했고,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중간에 과장님이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요정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침착하게, 모르면 모른다고 하세요. 그게 더 프로페셔널해요."
"좋은 지적이십니다. 제 생각이 부족했네요. 어떻게 보완하면 좋을지 조언해주시겠습니까?"
"+10점!" 요정이 속삭였다.
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많이 발전했네요. 이제 청중을 마주보면서 발표하시고, 피드백도 잘 받아들이시고. 다음 주 임원 발표 해볼래요?"
나는 회사 책상에 작은 거울을 놓았다. 피드백을 받은 뒤에는 자리로 돌아와 거울을 본다. '나는 나의 부족함을 인정했나?', '피드백을 어떻게 수용해야할까?', '이 순간을 어떻게 성장의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마치 그때 그 요정이 빨간 펜으로 점수를 매기듯이.
때로는 거울 속에서 요정이 윙크하는 것 같다. "오늘은 몇 점?" 하고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다. 발표 전에도 거울을 들여다본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 거울 속에는 언제나 성장하고 있는 내가, 그리고 그런 나를 지켜보는 작은 요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