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무대고, 주변 사람들은 관객이었다.
객석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나는 늘 떨었다. 혹시 내 연기가 우스웠을까? 내 대사가 이상했을까? 내 몸짓이 어색했을까?
세상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버스를 탈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매 순간이 공연이었다. 카페에서는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에 움찔거렸고, 회사에서는 동료들의 속삭임에 숨을 죽였다. 내가 실수라도 하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망신을 당하면 그들이 얼마나 비웃을까.
살아가는 게 피곤했다. 관객들의 평가를 의식하다 보면 대사 한 마디도 쉽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 못했고,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무대 위에서 숨어있고 싶었다.
그날도 퇴근길, 누군가 내 뒷모습을 보고 웃은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었다. 무작정 골목길로 달아났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걷다 보니 처음 보는 거리였다. 담쟁이덩굴이 낡은 벽돌 건물을 타고 올라간 골목 끝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타인의 서재'
희미하게 빛나는 간판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유리창 너머로는 책장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문을 열자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서 오세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나타난 노파는 내게 한 권의 책을 건넸다. 표지도 제목도 없었다.
"이 책이 당신에게 새로운 무대를 열어줄 거예요."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활자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관찰하듯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글자들이 무대의 커튼처럼 걷혀갔다. 나는 그 낯선 무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역할과 색다른 시선이 내게 주어졌다.
매일 아침 아내의 항암치료에 힘이 되고자 웃는 연습을 하는 남자가 되었다.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올리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일 줄 몰랐다.
해고 통지를 받고도 아이들 앞에서 씩씩한 척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텅 빈 통장을 보며 목구멍에 밥알이 걸렸다.
취업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청년이 되었다. 또 한 번의 거절 메일에 한숨을 삼켰다.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천장을 보며 뒤척이는 밤이 길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나는 새로운 무대에 섰다.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를 보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이 내 것이 되었다. 그들의 희망과 절망이 내 심장을 뛰게 했다.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들의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1인칭으로 살듯,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1인칭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늘 객석의 시선을 의식했지만, 그들도 각자의 무대에서 주연을 맡고 있었다.
내 행동을 평가할 만큼 여유로운 관객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살기에도 벅찼다.
마지막 장을 덮자 책은 사라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제 나는 달라졌으니까.
더 이상 객석의 시선에 떨지 않았다. 누군가 웃어도, 누군가 속삭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도 자신의 이야기에 바쁠 테니까.
내 앞에서 누군가 한숨을 쉬면 '나를 싫어하나?' 대신 '저 사람의 하루는 어땠을까?' 생각했다. 회사에서 동료가 어두운 표정이면 '내가 뭘 잘못했나?' 대신 '무슨 고민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변했다. 관객의 시선을 두려워 하던 배우에서, 이제는 다른 이의 무대에도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퇴근길의 직장인... 그들은 더 이상 나를 평가하는 관객이 아니었다. 그들도 나와 똑같이 각자의 무대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이었다.
그 순간, 세상이 조금 더 넓어졌다. 마치 그 비밀스러운 서점처럼, 무한한 이야기가 숨어있는 곳이 되었다. 이제 나는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난다. 책장을 넘기듯 다른 이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수많은 이야기 속을 자유롭게 오가는 주인공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