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너머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에서, 타인의 기대에서, 의미 없는 말들에서. 광고판은 끊임없이 깜빡였고, 스마트폰은 쉼 없이 진동했으며, SNS는 매 순간 누군가의 완벽한 삶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침묵을 경험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저녁, 나는 지하철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배터리가 5%라는 경고가 떴지만, 침묵이 두려워 음악을 계속 틀어 놓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지만, 아무도 서로를 보지 않는 풍경.
그때였다. 지하철이 역에 정차하며 순간적으로 음악이 끊겼다. 그 짧은 틈새로 한 포스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림자 너머, 당신의 진짜 이름을 만나러 오세요."
지하철 벽면에 붙은 작은 포스터였다. 검은 배경에 흐릿한 빛이 비치는 동굴 입구 사진,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동굴 안의 반짝임》 — 한시적 팝업스토어. 진실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순간 이어폰의 배터리가 다했다. 청각을 가득 채우던 음악이 사라지자, 지하철의 소음이 날것으로 들려왔다. 차량의 덜컹거림, 옆자리 사람의 거친 숨소리, 건너편 할머니의 한숨,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의 웃음소리. 세상은 갑자기 너무 크게 들려왔다.
"영등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내릴 역이 아니었지만, 나는 충동적으로 일어났다. 문이 열리자 익숙한 소음의 벽이 나를 반겼다. 역사의 광고판, 사람들의 발소리, 스마트폰 알림음이 한데 섞여 거대한 소음의 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벽을 뚫고 나는 포스터에 적힌 주소를 찾아 걸었다.
낡은 상가 건물 지하, 간판 하나 없는 골목길. 내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주변에는 카페도, 상점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주소를 확인하려던 찰나, 좁은 계단과 내려가는 화살표가 눈에 들어왔다.
화살표를 따라 내려간 곳에는 오래된 철문이 하나 있었다. 문 위에는 단 하나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은 지금, 그림자의 세계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문을 밀자 무겁게 열렸다. 좁고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복도를 따라 걸을수록 바깥세상의 소음이 점점 희미해졌다. 복도 바닥에는 간격을 두고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침묵했나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질문을 바라보았다. 언제였을까? 의식적으로 침묵했던 때가 정말 기억나지 않았다.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사는 동안, 침묵은 그저 피해야 할 공허함일 뿐이었다.
몇 걸음 더 나아가자 또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
"감각을 닫고, 마음을 열어보세요."
어둠 속에서도 그 글자들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인 박동이 내 전신을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문장은 복도 끝, 또 다른 문 앞에 있었다.
"질문은 빛보다 먼저 도착합니다."
문을 열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완전한 침묵이었다.
넓고 둥근 공간이 펼쳐졌다. 중앙에는 몇 개의 책상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각 책상마다 작은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벽에는 투명한 글씨들이 천천히 흘러다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보였다. 하지만 모두 자기 공간에 조용히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책상에 다가가자 작은 카드 한 세트와 노트, 그리고 펜이 놓여 있었다. 카드에는 각각 다른 질문이 적혀 있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나요?"
"그림자가 당신을 붙잡은 적이 있나요?"
"내가 선택한 이 삶에서, 나는 지금 어디쯤인가요?"
마음을 사로잡는 첫 번째 질문을 집어 들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나요?" 과거형으로 적혀 있다는 게 묘했다. 마치 내가 이미 그 두려움을 지나온 것처럼.
펜을 들었지만, 바로 대답을 적을 수 없었다. 두려움이라... 실패? 외로움? 거절? 가능한 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어떤 것도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벽에 투영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침묵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침묵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순간, 그리고 거기서 마주해야 하는 나 자신을. 항상 음악을 틀거나, SNS를 확인하거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했던 이유는 자신과의 대화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노트에 천천히 적기 시작했다.
"나는 침묵을 두려워했다. 침묵 속에서 들릴지도 모르는 내 진짜 목소리가 두려웠다. 그 목소리가 내게 말할지도 모르는 진실이 두려웠다."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이유 없이. 아니, 이유가 너무 많아서.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동굴 안의 반짝임》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우리는 빛을 찾아 헤매지만, 가장 중요한 진실은 종종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 그림자를 피하는 대신 그것을 통과해야 한다. 당신의 가장 큰 두려움이 당신의 가장 큰 스승이 될 수 있다."
책의 저자는 '은쇼'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 이름조차 그림자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멈춘 듯한, 혹은 시간 바깥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나는 여러 질문 카드를 골라 내 생각을 적었다. 때로는 은쇼의 책에서 문장을 필사하기도 했다.
벽에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도망친 게 아니다. 도착한 것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몸 안에서 무언가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혼란의 벽을 통과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침묵을 찾아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 깨달음이 내 안에 깊게 자리 잡았다.
노트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나는 지금,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사유의 방에서 나올 때, 또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문 위에는 "진실의 거울"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을 열자 완전히 어두운 방이 나타났다. 들어가자마자 문이 자동으로 닫히며 모든 빛이 차단되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올라오려는 찰나, 작은 불빛 하나가 천천히 밝아졌다.
그 빛은 거울을 비추고 있었다. 전신 거울에는 내 모습이 비춰졌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거울 속 내 모습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았다. 내 뒤로 그림자가 없었다.
거울 아래에 작은 글귀가 천천히 나타났다.
"그림자 너머에서 만난, 당신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요?"
진짜 이름? 무슨 의미일까? 내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문득 그것이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일 뿐,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이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담은 이름.
거울을 바라보며 깊게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확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괜찮게 느껴졌다. 완벽한 대답을 즉시 얻는 것보다, 그 질문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거울 옆에 작은 서랍이 열렸다. 그 안에는 여러 장의 카드가 있었다. 각 카드에는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선택한 삶을 기억하세요."
"오늘 내가 발견한 문장"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만 생긴다"
나는 가장 마음에 드는 카드를 하나 골랐다.
"당신이 선택한 삶을 기억하세요."
카드를 손에 쥐는 순간, 거울 옆에 또 다른 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 나가자 다시 바깥세상의 소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소음이 예전처럼 압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났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15분간 침묵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하루를 시작하는 가장 소중한 의식이 되었다. 그리고 매주 한 번은 《동굴 안의 반짝임》을 다시 찾아간다. 때로는 새로운 질문 카드를 골라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침묵 속에 앉아 있기도 한다.
스마트폰은 여전히 사용하지만, 이제는 의식적으로 '디지털 해질녘' 시간을 갖는다. 저녁 8시 이후에는 알림을 모두 끄고, 가끔은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쓴다. 《동굴 안의 반짝임》에서 구입한 '사유 노트북'에는 나의 생각들이 하나둘 채워지고 있다.
그날 받은 카드는 내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
"당신이 선택한 삶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 아래에 내가 추가한 문장.
"나는 도망친 게 아니다. 도착한 것이다."
오늘도 지하철에서 포스터를 본 사람들이 동굴을 찾아올 것이다. 누군가는 그저 유행하는 팝업 스토어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일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진정한 여행은 그림자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림자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넓은 세계와 더 깊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은쇼의 마지막 문장이 떠오른다.
"모든 동굴의 끝에는 새로운 빛이 있다. 그리고 모든 그림자의 너머에는 당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