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에서 살던 두 사람이 같은 교차점에 멈춘 날
체형교정 수업 첫날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나는 옆에 앉은 언니와 조를 짜서 함께 운동을 했다. 체형 메타인지를 위해 서로의 몸을 사진 찍어주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언니의 사진을 찍어주고, 언니가 내 사진을 찍어줬다. 그리고 언니가 말했다. “실물이 훨씬 나으세요~” 그 말이 어쩐지 참 기분이 좋았다. 아마, 그냥 외모에 대한 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잘 봐주는 사람이라는 느낌 때문이었을지도.
둘째 날, 우리는 백 익스텐션 동작을 하며 서로의 손목을 잡아 당겨주었다. 한순간 몸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나눴다. 뭔가 굳어 있던 내 안의 조각이 쭉— 펼쳐지며 숨을 쉬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그걸 계기로 언니와 몇 마디씩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엔 그냥 ‘착하고 말 잘 걸어주는 사람’ 으로 생각했다. 언니가 셀카를 찍으며 “인증샷 찍고 청년 마일리지 적립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동안 귀찮아서 신청도 안 했었는데, 언니는 나에게 근처 관광명소에 같이가서 마일리지 적립하자는 제안을 했다.
언니가 내 집이 멀 것 같아 걱정하며 “어디 사세요?” 하고 물었고, 우리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대학생 때 언니 집 근처 아동센터에서 멘토링을 했었고, 언니는 다음 주에 거기로 실습을 나간다고 했다.
너무 신기했다. 삶의 경로가 교차하는 소리를 그 순간, 또렷하게 들은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쩐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았고, 조금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통하는 관계가 있다면, 우리의 첫 만남은 정확히 그랬다. 할 말은 더 많았지만, 우리는 수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운동 루틴을 발표할 시간이 되자, 우리는 약속한 듯 같이 손을 들었다. 발표 시간. 나는 내 몸의 이야기를 꺼냈다. 뒷목 통증, 그리고 오다리.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불균형이었다.
등을 펴는 외회전 운동, 백 익스텐션, 거북목을 완화하는 턱 당기기와 목 스트레칭, 오다리를 잡아주는 내전근 강화 동작들까지. 몸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걸 개선하기 위한 맞춤형 동작들. 지금의 나에게 꼭 맞는 루틴을 짜서 설명했다. 그날의 발표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내 몸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나누는 시간이었고, 서툴지만 진심을 꺼낸 자리였다.
사실 나서서 발표를 한 이유는, 우수참여자에게 주어지는 요가매트 때문이었다. 목적달성! 우리는 용기의 증표를 나란히 짊어지고 나섰다. 이미 그때, 우리 둘은 같은 리듬으로 걷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근처 샐러드 가게에 함께 들어가 테이블에 앉자마자 이야기가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내 이야기를 꺼냈고, 소설을 쓰고 있다는 말도 했다.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언니는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었다.
말이 통하기 시작하자, 삶의 방향까지 교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줄줄이 드러났다. 나는 사회복지를 떠나 글을 쓰는 중이었고, 언니는 글 쓰는 직업을 떠나 사회복지를 배우는 중이었다. 진로가 정확히 교차된 우리 둘의 이야기는, 마치 평행세계에서 살다 잠시 같은 교차로에 발을 내딛은 사람들 같았다. 내가 놓은 것을 언니가 이어가고, 언니가 놓은 것을 내가 이어가는… 서로의 잊힌 꿈을 대신 품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때 느꼈다. 이 사람에게는 내 안의 이야기들을 안심하고 꺼내 보여도 괜찮겠구나. 지난 사랑의 기억들까지.
나는 고백했다가 차인 썰을 꺼냈고, 언니는 “어떡해ㅠㅠ” 하면서 진심으로 안아줬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언니가 나보다 더 아파했다. 언니는 똥차 만난 이야기(그것도 진짜 역대급)를 해줬고, 본인이 자조적으로 말한 별명이 “병돈나래, 병신들의 마돈나”라는 걸 듣고 우리 둘은 거의 쓰러지도록 웃었다. 우리는 그날 말 그대로 한참을 떠들었다.
2주 뒤면, 나의 첫 공동출판물이 나온다. 세상에 단 네 권뿐인 귀한 책. 그중 한 권을 언니에게 주기로 했다.
그건 단순한 선물이 아니다. 내 이야기를, 나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온전히 건네는 첫 순간이다. 그 마음을, 언니라면 알아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알아주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그날 이후, 나는 언니와 다시 마주앉아 소설 이야기를 나누는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집 앞의 작은 카페에서 우리는 또 어떤 이야기를 꺼내게 될까. 서로를 조금 더 알게 되고, 서로의 서사를 더 깊이 건너가게 될까.
나는 안다. 이런 만남은 계획해서 만들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마치 우주의 손끝이 살짝 흔들려 우리의 삶의 궤도가 정확히 그날, 그 자리에서 교차하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이건 우연이 아니다. 이건, 내가 진짜 나로 살아가기 시작했기에 비슷한 진동을 가진 사람이 그 진심의 파장을 따라 찾아온 것이다.
수업의 끝자락에서, 강사님이 말했다.
“체형교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서적 안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입니다. 호흡으로 마음이 릴렉스 되어야, 몸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너무 힘주고 살지 말고, 여유를 가지세요.”
문득 책에서 읽은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의 상반신은 물병과 같다. 숨을 들이마시면 물이 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내쉬면 천천히 수위가 내려간다.”
몸이 편해지려면 내가 내 안의 물결을 믿고 흘러가게 놔줘야 한다는 걸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언니와의 만남도 그랬다. 무리하지 않았고, 애쓰지 않았고, 그저 서로의 말과 온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숨 쉬는 것처럼 가까워졌다.
지금 나는, 등을 펴고, 턱을 살짝 당긴 채 복부 깊숙이 공기를 불어넣는다. 엉덩이 아래에서부터 차오르는 숨을 느끼며, 잠시 이 하루에 머물러본다. 나를 있는 그대로 세우는 법을, 천천히 배워가기로 했다. 내일도 이렇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몸이 기억한 이 감각을, 마음도 오래 간직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