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바다는 고요하지 않다 | EP .3

보통의 일상을 유지한다는 것

by 은수
1.png
2.png
3.png
4.png
5.png
6.png
7.png
8.png
9.png
10.png
11.png

권고사직을 당하고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왼쪽 손목에 작은 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회사의 과도한 업무로 무리해서 손목뼈가 틀어진 줄 알았다. 마침 추석이라 병원은 다 휴진 상 태였다. 손목에 올라온 작은 혹은 특별한 통증이 없었지만 나는 손으로 일 하는 직업을 가졌기에 덜컥 겁이 나고 무서웠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병원부터 방문했다. 의사의 권유로 초음파 검사를 받 았더니 세상에, 혹이 올라온 지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데 0.5mm의 동그란 물혹이 모니터에 잡혔다. 병명은 ‘결절종’이었다. 손목을 자주 사용하면 그만큼 관절이 접히면서 결국 찢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그 찢어진 조직 사이로 관절액이 새어 나오게 되는데 액 주변으로 하얀 섬유성 피막이 형성 되고 그 안에 서서히 관절액이 차오르며 결국 혹이 된다는 것이다. 당시 나 를 진단한 개인 병원의 의사는 결절종 때문에 일상생활에 불편할 것이라고 말하며 일단 굵은 주삿바늘로 물혹을 찔러 액을 빼내 치료를 마쳤다.


얼마 후 내 왼쪽 손목은 같은 자리, 같은 크기로 결절종이 재발하였다. 병원에 다시 방문해 바늘로 찔러 액을 빼낸다 해도 재발할 것 같았다. 별다 른 통증이 없었기에 이번엔 그냥 두기로 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결절종이 생겼다가 몇 달 후 터져 그대로 사라졌다는 경험담을 읽으며, 나도 그 렇게 되기를 바라보았다. 인터넷의 경험담대로 내 결절종 또한 3-4개월이 지나니 물혹이 터져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경험담과 다르 게 나의 결절종은 하루 이틀 후 같은 자리에 재발했다. 통증은 없으니 그대 로 방치하다 물혹이 차오르고 터지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어느새 결절종은 나의 평범한 일상이 되어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왼쪽 손목에 평소와 다른 통증이 생겼다. 그곳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훨씬 커진 결절 종이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왼손으로 무엇을 움켜쥐거나 힘을 줄 때마다, 심지어 살짝 비틀기만 했는데도 결절종 부근에 찌릿한 통증이 지나갔다. 커져 버린 결절종이 손목의 신경 다발을 압박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년 가까이 결절종을 방치했다. 결절종은 이미 나의 일상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만히 손목에 힘을 빼도 심한 통증이 지 속되었다. 한창 문구 사업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기에 그림을 멈출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오른쪽 손목은 이미 오래전부터 만성 염증으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양 손목이 다 아파서 매일 진통제를 먹어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문구 창업은 2년 동안 열심히 운영했음에도 수익이 미진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폐업을 결정하였다. 손목이 아픈 김에 오랫동안 그려왔던 그림을 반년 쉬어 보기로 결정했다.


20XX년 4월.


대형 종합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CT 촬영을 권유하였고, 그 결과 왼쪽 손목이 낫기 위해선 결국 수술밖에 답이 없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때 촬영된 나의 결절종은 어느새 한 개가 아닌,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땅콩 모양이었다. 바로 입원을 결정하고, 수술 날짜를 잡고 집으 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기분이 내내 심란했다. 내가 그림을 그려봤자 얼마 큼 그렸다고 이렇게 큰 결절종이 생겼을까. 기껏해야 전 직장에서 야근하 면서 업무로 그림 그린 것 외에는 퇴근 후 그림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았는데 말이다. 다른 일러스트레이터 보다 훨씬 적은 그림을 그렸다는 생각이 들자 억울한 감정에 휩싸였다.


입원 수속을 밟고 수술 당일까지 시간은 평탄하게 흘러갔다. 수술은 30 분이 채 되지 않아 간단하게 끝났다. 수술 후 누워있는 나에게 회진 온 의 사는 수술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더불어 결절종 재발률은 평균 20% 로 높은 편이지만 같은 자리에는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의사 말대로 수술을 하고 2년이 지난 지금도 결절종은 재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실밥을 풀러 갔을 때, 의사는 이제 일 상으로 돌아가도 괜찮고 운동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수술 후 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림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새벽 바다는 고요하지 않다 |EP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