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여행 중, 교보문고 경성대부경대점에 들러 책 한 권을 샀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똑같은 교보문고겠지만 국어국문학도로서 서점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민음사에서 출간 중인 세계문학전집 코너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매대에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이 놓여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등 익히 봐왔던 작품들이 즐비했지만, 계속 눈에 밟힌 작품은 프랑수아즈 수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였다. 결국 충동적으로 책을 샀다. 책 뒤에 써진 간단한 줄거리를 읽고 나자 더 격하게 내용이 궁금해졌다. 이후 집 근처 스타벅스와 수원으로 올라가는 ktx에서 이 책을 읽었다.
당신이 다시는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당신의 시몽. p.73
폴과 로제는 6년 동안 연애를 하고 있다. 로제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폴을 방치하게 된다. 이에 폴은 항상 기다리는 입장이 되어 외로워하지만 그 상황마저 사랑이라 생각한다. 그러던 중 폴은 미국인부인의 의뢰로 인테리어를 맡게 되고 거기서 시몽을 만나게 된다. 시몽은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여 그녀를 쫓아다니며 사랑을 고백한다. 폴은 그런 시몽과의 나이 차이와 주변의 시선을 염려하면서도 시몽에게 매력을 느낀다.
뻔한 남녀 간의 연애와 사랑, 권태기에 관한 내용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오해는 역설적으로 이 작품이 순수문학의 정석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폴과 로제 그리고 시몽의 시선을 번갈아가며 비추어주는 설정을 통해 독자는 모두의 감정에 동화되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 장치는 별다른 대화와 상황설명 없이도 독자들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간결하면서도 미사여구 없는 문장임에도 읽는 이들을 매혹한다.
"폴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한 시간 뒤면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어." p.136
작품을 읽으면서 시몽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잣집 아들에 출중한 외모와 변호사라는 변변한 직업을 가진 시몽은 13살 연상의 애인 있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폴이 그를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폴은 계속해서 시몽을 내치고, 이후에 그와 연인관계가 되어서도 진정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로제의 부재를 무마하기 위해 시몽에게 키스를 한다. 그러다가 결국 서로를 그리워하던 폴과 로제의 재회로 시몽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서사 전개 중 폴의 시점은 로제와 시몽의 접점이란 이유로 가장 많이 등장한다. 자연스럽게 폴에게 이입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허나 필자는 폴도, 로제도 아닌 시몽을 중점으로 작품을 읽었다. 시몽이 말하는 사랑과 관계의 철학이 필자의 가치관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시몽은 사랑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p.101
시몽은 폴에게 사랑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폴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한다. 허나 모순적이게도 시몽은 폴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주기만 한다. 그는 폴에게 사랑받지 못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스스로 괜찮다는 말만 되뇐다. 어쩌면 시몽은 작품 속 인물 중 가장 어리지만 가장 성숙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허나 로제는 시몽의 가치관과 열정을 청년시절의 패기와 경험 없음으로 생각한다. 폴마저 은연중에 그를 끝까지 어린 풋내기로만 볼뿐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여실히 알고 있음에도 시몽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흉내 내지 않는다. 오히려 본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폴을 대한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구걸하면서도 본인의 모습은 잃지 않으려 하는 시몽의 모습은 외로움을 못 이겨 시몽을 만나면서도 로제를 그리워하는 폴, 다른 여자를 거치고 거쳐 폴에게 돌아오는 로제보다 사랑에 있어서 굳건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로제와 폴의 재결합 이후, 폴의 집에서 짐 정리를 하고, 폴과의 작별인사를 끝내 하지 못한 채 뛰쳐나가는 시몽의 모습이 걱정되지 않는다. 작품 속 정체된 인물들과 다르게 오직 시몽만이 틀 밖으로 탈출한 것이다.
"모르지. 어째서 당신은 내가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망치기를 바라는 거지? 내가 관심 있는 건 오직 내 현재뿐인데 말이야.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해." p.106
시몽과 폴의 미래에 대한 대화에선 그가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시몽은 변호사라는, 지위와 명예가 인정되는 직업을 갖고 있다. 비록 선임변호사의 밑에서 일하지만 그가 변호사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젊은 나이에 비해 그가 지닌 것은 너무나도 많다. 부유한 미국인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재력이면 재력, 교양이면 교양, 심지어 출중한 외모까지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가진 것들을 뽐내지 않으며, 당장 맞이하는 현재를 즐기는 것에 집중한다. 시몽은미래를 위해 현재를 소비하는 것을 비효율적인 과정이라 여긴다. 우리 사회는 젊은 사람들에게 현재의 투자를 요구한다. 즐기고 노는 것은 늙어서 해도 된다는 식의 통념은 가장 즐겁고 자유로워야 할 시기에 족쇄를 채운다. 우린 꿈과 미래를 위해 투자되는 청춘에게 너무나도 관대하다. 지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을 얻고, 즐기는 건 나중에 하면 된다는 식이다. 허나 그 시기가 아니면 깨닫지 못하고, 행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풋풋하고 정열적인 사랑, 친구들과의 우정, 익숙한 곳으로부터의 도피. 이것들은 사회에 대한 겁과 내성이 생기기 전에만 행할 수 있는 특권과도 같다.
학점, 인맥과 다양한 스펙 쌓기는 분명 사회에 진출할 때 도움이 되지만, 이를 능가하는 것이 남들이 해보지 못한 경험이야.
대학교 선배로부터 위와 같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같은 나이에 남들보다 많은 경험을 하는 것. 그것이 굳이 계획되고 단계적인 무엇이 아니더라도, 충동적이고 무계획에 가까운 것들이라도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과거를 돌이켜보며 후회를 하는 것만큼 비생산적이고 우울한 일은 없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할 바에, 당장 주어진 현재를 즐기는 것이 정서적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낫다. 오히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을 것이다. 또한 현재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것이 공부가 될 수도, 유흥이 될 수도 있다. 과정이 다를 뿐, 어느 하나를 지목하여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결국 작품 속 시몽이 추구하는 가치관은, '현재를 즐기자'는 얘기다. 그것이 미래 따윈 염두하지 않고 막살자는 것이 아니다.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은 접어두고, 즐길 땐 즐기고, 집중할 땐 집중하여, 주어진 환경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자는 말이다. 물론 불안, 고민, 걱정은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대비하게 하기에 이롭기도 하다. 허나 과도한 불안과 걱정은 될 수 있는 일도 그르치게 만들고, 연쇄작용으로 우릴 후회 속에 살게 하기도 한다. 후회의 굴레에 갇혀 제자리걸음만 하는 삶을 살기엔 지금 당장의 시간도 아깝다. 그렇기에 우린 시몽이 자신의 현재를 대하는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여기 내 몸이 있어요. 내 열정과 애정이 있어요. 이것은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당신에게 준다면, 나로 하여금 다시 사는 맛을 느끼게 해 줄지도 모르죠." p.102
시몽의 시기를 겪어본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삶의 원기가 살아나고, 보고 싶단 말 한마디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오는 그의 젊음. 그의 철없는 시절을 그리워할 것이다.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살진 않았지만, 앞으로 당신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아. 당신은 내 인생의 여인이고, 무엇보다도 내게 필요한 사람이야. p.133
시몽처럼 절절하게, 혼신의 힘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p.139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던 중,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바로 위에 있는 폴의 생각이다. 그녀가 로제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는 '매몰비용'때문이다. 매몰비용은 이미 회수할 수 없는 것들의 가치를 의미한다. 폴은 그동안 로제와 함께 일궈온 시간과 기억이 아까웠기에, 허물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폴이 머뭇거리는 데에 나이 역시 한몫했을 것이다. 그녀의 나이에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인간은 나이 들수록 아는 것이 많아지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하게 된다. 폴은 이것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해보지 않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보단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시몽은 폴에게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다. 허나나이 듦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젊은은 부러워할만한 시절이 아니다. 누구나 청년시절을 거치고 노년기를 향해 달려간다. 이는 시몽도, 폴도, 로제도 마찬가지다. '나도 저때 저럴걸'하며 후회하는 본인의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각자가 속해있는 시기는 각각의 장점이 있다. 장점을 알아보기에도 짧을 수 있는 시간을 뒤돌아 후회하는 데 써선 안 될 것이다. 점점 밀리고 밀려 후회의 구렁으로 빠지게 될 수 있다.
필자에게 있어 시몽은 불쌍하면서도 배울 점이 많은 인물이다. 그의 방향 잃은 사랑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가 삶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품을 읽으면서 스스로도 모르게 시몽을 응원하는 나 자신을 보기도 했다. 어쩌면 현실적인 폴과 로제의 삶이 거시적으론 안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기에, 당분간은 현재를 즐기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