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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스 Jan 25. 2020

[비평문]김애란의『서른』을 읽고

서른 즈음에


  9에서 10으로 넘어갈 때 1의 차이는 다른 세월의 차이보다 크게 느껴진다. 19에서 20으로 막 넘어온 지금 나의 상태도 그러하다.




  우리는 어렸을 때 하고자 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학년이 높아질수록 현실이라는 벽에 막혀 이상을 현실에 끼워 맞춘다. 화가였던 꿈이 대기업 직장인으로 바뀌고 영화감독을 꿈꾸던 친구는 취업률이 높은 학과에 진학한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후 서른 즈음 되면 자신이 진정하고 싶어 했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채로 말이다. 과연 서른 즈음이 되면 오랫동안 넣어두었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지켜야 할 가정이 생기면 우리는 현실에 만족하여 10년, 20년 전의 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처럼 상황은 사람을 바꾼다. 한때 간절했던 일들이 하찮아지고 꿈을 쫓아가는 이상주의자들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그 시선들은 이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일 것이다.


  과거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환상을 가진 채 불문과에 진학한 그녀의 모습은 갓 대학생이 된 우리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 세상의 불공정함과 부도덕함을 마주하지 않은 나름 깨끗한 상태이다. 이와 별개로, 부푼 꿈을 안은 채 입학했지만 지금은 볼품없고 시시한 어른이 된 그녀의 서른을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세월이 가다 보면 현실과의 타협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꿈을 낮추고 접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서른, 마흔 나이가 들어도, 삶에 여유가 없더라도 가슴 한 편 정도에는 자신이 어린 시절 꿈꾸던 이상을 품고 있으라는 것이다. 실현 시키지 않아도 된다. 힘들 때마다 액자 속에 있는 사진처럼 들여다보고 다시 달려가면 되는 것이다. 꿈이란, 실현시키지 못해도 놓아버리지만 않으면 여전히 바라보고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액자 속 사진은 빵집 카드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꿈을 성휘 언니에게 맡긴 것이고 서른이 되어 꿈을 배송 받은 것이다. 뻔한 강의 내용 속 ‘꿈’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던 연유는 그녀 자신도 자신이 꿈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을 잃어버린 어른은 자신이 빠진 굴레에 주변 사람들을 내몬다.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지만 인정할 용기가 나지 않는 어른들. 그들로 인해 혜미와 같은 상황에 빠지는 아이가 생기는 것이다. 바쁘게 자신들의 꿈을 찾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생각은 자신의 불행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생각에 불과하다. 이상적이지만 자신의 꿈은 놓아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꿈 또한 하찮다고 여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시시한 서른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된 해에 쓴 글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961076  비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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