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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스 Jan 22. 2020

이상의 『날개』를 읽고

은화 모티프를 중심으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너무나도 유명한 『날개』의 도입 문장이다. 이 작품에 대한 첫감상은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작가인 이상의 작품이니 한번쯤 읽어봐야지' 정도에 불과했다. 허나 현대소설 강의를 통해 이상의 『날개』를 다시금 접하게 되자 전에는 보이지 않던 미묘한 상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은화'이다. 작품 속 화자는 은화를 통해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자본주의로의 회귀를 경험하게 된다.

이상의 자화상


  우선 『날개』를 은화란 안경을 쓰고 읽는다면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상황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1. 아내로부터 은화를 받게 되지만 벙어리에 모아둔 뒤 변소에 버림.

2. 은화를 놓고 가는 아내의 쾌감을 느껴보기 위해 은화를 들고 외출을 하지만 한푼도 쓰지 못하고 돌아옴.

3. 내객들이 했던 것처럼 은화 오 원을 들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가자 아내가 처음으로 나를 아내의 방에서 재워줌.

4. 아내에게 은화를 전부 주고 집을 나선 뒤, 은화를 욕망하게 되며 날개를 달고 다시 한 번 날기를 소망함.


  아내로부터 받은 은화를 벙어리에 모아둔 뒤 변소에 버리는 1의 상황에서 '나'는 이상에 갇힌 채 현실에서 이뤄지는 순환을 깨닫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기에 아내로부터 은화를 받아도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기껏 벙어리에 모은 은화를 변소에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은화는 돈을 상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권력이자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사회에서 돈의 의미를 모르며, 영향을 받지 않는 '나'는 현실로부터 도태된 인간이다. 그저 이불 속에 들어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연구를 하는 정신이상자에 불과하다.


  이런 '나'가 은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은화를 놓고 가는 아내의 쾌감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전에도 '나'는 아내의 내객들이 왜 아내에게 은화를 주는 지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이내 귀찮아한다. 이후 다시금 궁금증이 일게 되고 이를 알기 위해 아내로부터 받은 은화를 챙겨 밖으로 향한다. '나'는 밖으로 나가게 되면 은화를 아무나에게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한다. '나'는 돈 쓰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사람처럼 은화를 한 푼도 쓰지 못한채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럼에도 '나'가 은화를 들고 외출을 시도한 것은 현실로의 복귀를 시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상황까지 '나'는 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본주의란 현실로 편입되지 못한 상태로 존재한다.  돈을 가졌지만 여전히 돈의 쓰임새를 모른다는 것은 자본에 대한 개념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에 자본주의로 형성된 현실로 회귀하기엔 준비가 덜 된 상태인 것이다.


   내객들이 계속해서 아내에게 은화를 주는 것을 본 '나'는 내객들을 따라 은화 오 원을 들고 아내의 방으로 찾아간다. 그날 '나'는 아내의 방에서 처음으로 자게 된다. 이는 '나'가 은화의 쓰임을 알게 됨과 동시에 현실로 회귀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 전까지 아내의 방과 '나'의 방은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었으며 '나'가 아내의 방에 머무를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아내가 외출했을 때 뿐이었다. 허나, 은화를 아내의 손에 쥐어주자 '나'는 처음으로 아내의 방에서 자게 되고, 이튿 날에도 은화를 챙겨가자 아내는 '나'를 그녀의 방에서 재워준다. 은화가 곧 아내의 방으로 들여보내주는 입장권이 된 셈이다. 동시에 '나'는 아내가 그동안 몸을 팔아 돈을 벌어왔음을 알게된다.


  위의 상황만으론 '나'가 현실인 자본주의로 편입되었다고 단정짓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아내의 방에서 자게된 뒤, 은화가 없음을 괴로워하고 은화를 욕망하게 된 '나'의 모습을 통해 말끔히 해결된다. '나'는 아내에게 돈을 전부 줘버린 것을 후회한다. 은화가 없기에 '나'는 경성역 근처에서 마음 놓고 커피를 마실 수도 없으며 더 이상 아내의 방에서 잠들지 못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할 수 없으며 대우 받을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는 것이다. 과거엔 은화는 있지만 쓸 줄 모르는 상태였기에 현실로 편입될 수 없는 존재였지만, 현재에 와선 은화의 쓰임은 알지만 은화가 없기에 현실로부터 도태되는 존재가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존재를 인정 받을 데가 없는 경계인인 것이며 현실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나'에게 은화는 현실로 돌아가는 열쇠였다.

   이처럼 은화'나'를 이상에서 현실로 편입시키는 요소이자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나'가 속하게 된 현실은 몸을 파는 아내와 아달린을 먹이는 아내라는 가혹한 곳이다.  이러한 현실은 이불 속에서 연구만 하면 되던 이상보다 못한 장소임을 '나'는 절실하게 깨닫는다. 결국 '나'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고자 하는 것은 가혹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이상으로 회귀하고자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4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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