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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스 Apr 02. 2020

[리뷰] 영화『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언젠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너와, 마찬가지로 너를 사랑하지 않을 나에게.

처음부터 나는 그렇게 깊은 바다 속에 혼자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외롭지는 않아. 처음부터 혼자였으니까.

  ‘첫’이란 관형사가 붙는 단어의 굴림은 달콤하다. 첫사랑, 첫눈, 첫 만남. 이렇듯 처음이 주는 달콤함은 함께한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까지 확장된다. 나의 처음을 함께한 사람. 그 사람과의 모든 기억이 아름다울 순 없겠지만, 처음 함께한 기억들은 끝내 아련하게 비추어진다. 어쩌면, 진실한 것은 처음뿐이며, 이후엔 모두 흉내일 뿐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남자가 안 생기면 호랑인 평생 못 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네."

  조제에게 츠네오는 모든 의미로 처음이다. 츠네오에게 익숙한 세상이 조제에겐 처음 만나는 세상이었다. 내비게이션, 호랑이, 바다에서 반짝이는 부서진 조개껍질조차 조제에겐 새로운 세상이며, 조제의 모든 처음엔 츠네오가 함께했다.

"더이상 고칠수 없대."

  그런 의미에서 조제와 츠네오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았다. 사랑의 정도를 나누는 시도는 멍청하기 짝이 없지만, 두 사람의 사랑에 기울기는 없었다. 그저 경험과 반복에 기울기가 있었을 뿐이다. 사랑할 땐 평등했지만, 츠네오가 조제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사해주는 동안은 기울어진 관계였다. 유모차가 고장 나기 전까진, 즉,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이 깊어지기 전까지 조제는 직접적으로 츠네오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하나, 유모차가 고칠 수 없게 되고, 츠네오의 등을 빌리는 순간부터 조제는 츠네오에게 온전하게 의지하게 된다. 츠네오가 조제의 세상이 된 것이다.

"저기,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

  네가 나의 세상이 된다는 건 낭만적이지만, 그때야말로 끝을 준비해야 하는 순간이다. 깊어짐과 불안은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험하다. 그래서 차근차근 끝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감정이 메말라가도록 억눌러선 안 된다. 끝을 준비함은, 네가 없는 나의 세상을 일궈가는 것이다. 언젠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너와, 마찬가지로 너를 사랑하지 않을 나를 옅게나마 그려야 한다. 네가 나의 세상이 되어, 우리의 세상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세상이 나의 세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는 여자도 있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조제는 끝을 준비했기에, 담백한 이별 후 자신만의 세상에서 다시금 살아간다. 츠네오 없인 장도 볼 수 없고, 호랑이와 물고기도 볼 수 없었던 과거로부터 벗어났다. 그래서인지, 전동휠체어를 탄 조제의 뒷모습이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조제는 미끄러지고 발을 헛디뎌도 굴하지 않고 그녀만의 세상에서 조제답게 살아갈 것이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8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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