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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스 May 04. 2020

[리뷰] 이승우의『생의 이면』을 읽고

사랑이 될 수 없는 것


 무엇이 사랑일까? 진부한 질문이다. 사랑은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기에, 모두 답이 될 수 있으면서도, 그 무엇도 답이 될 수 없다. 거창한 질문에 비해 시시한 답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이 아닐까? 이 질문은 전자에 비해 신선하다. 그리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


아, 사랑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낯선가. 나는 그 단어가 내쏘는 자장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달리 대치할 말이 없다면, 어쩔 것인가. 사랑이라고 이름할밖에. p.168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사로움에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상상할 수도 없는 뜻밖의 감격을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겠는가. p.213
그것이 사랑의 역할이다. 사랑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한다. 사랑은, 그것이 없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p.214


『생의 이면』엔 절대적으로 사랑을 찬양하는 박부길의 시선이 자주 등장한다. 박부길에게 사랑은 사사로운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상상할 수 없는 일조차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에게 사랑은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분홍빛 필터를 장착한 채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듯 하다. 이러한 박부길의 사랑에 대한 찬양을 보면 그의 사랑이 열정적이고 숭고한 무엇으로 비추어진다.

 그러나 박부길이 그녀에게 퍼부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무엇이든 사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박부길의 사랑은 ‘무엇이든’에 속하지 못한다. 사랑에 대한 폭넓은 정의는 사랑의 이해관계에 놓인 상황, 감정, 행위, 인간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때론 물리적·심리적 폭력을 사랑으로 포장하며 집착과 가스라이팅을 ‘사랑하기 때문에’란 아름다운 말로 감싼다. 어떤 표현으로도 가당치 않은 사랑은 부질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대한 감정이다. 그렇다고 복 받은 사람만 사랑을 느끼는 건 아니다. 사랑은 일상에 넓게 흩뿌려져 있다. 평범하며 눈에 띄지 않는 곳에도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 이처럼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사랑이다. 입학은 쉬우나 졸업이 어려운 대학과 같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우리가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짜증’이란 단어와도 유사하다. 우린 일상에서 느끼는 불쾌함, 귀찮음, 분노, 경멸, 실망, 괴로움 등의 다채로운 부정적 감정을 ‘짜증'이란 한 단어로 뭉뚱그린다. 사랑도 그렇다. 설렘, 이해, 편안함, 즐거움, 추종 심리, 다행감 등의 감정을 모조리 ‘사랑’이란 단어의 범주에 넣어버린다. 행동, 대상, 상황마다 느끼는 감정은 미세하게라도 전부 다르다.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라고 하기엔 위에 나열된 단어만 봐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획일화의 문제다. 그나마 부정 혹은 긍정의 두 부류를 각각 '짜증''사랑'으로 획일화한 건 양반이다. 문제가 되는 건 부정의 몫을 긍정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위에 나열한 ‘짜증’의 것을 ‘사랑’의 몫으로 넘긴다고 생각해보자. 분노는 사랑이 될 수 없다. 불쾌함 역시 사랑이 될 수 없다. 나머지 것들도 마찬가지다.

 박부길은 부정의 것을 긍정의 몫으로 넘겼기에 그가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들은 전부 사랑이 될 수 없다. 박부길은 큰 상처를 큰 사랑의 증거로 여겼다. 넘치는 숭배와 집착 역시 사랑의 증거로 여겼다. 그리고 그녀를 재단했다.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혔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사랑인 줄만 알았다. 어리석고 치졸하게도 큰 상처는 큰 사랑의 증거라고까지 이해했던 것 같다. 나만큼 절대적이고 순수하고 아름답고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p.261
그에게 그녀는 완벽함의 이데아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완벽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녀는 허상일 수 있다. 그가 만든 완벽함의 허상. 그가 보고 바라고 의지하고 꿈꾸는 그녀는 실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창조해 낸 완벽한 여자를 그녀에게 투사했을 뿐이다. p.240


 박부길은 자신의 이상에 부합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녀에게 주입했다. 스스로 꾸며낸 허상의 그녀를 사랑한다고 착각했고, 그녀가 '완벽한 사랑의 이데아'에 부합하지 않을 땐 그녀를 비난하고 또다시 '완벽한 사랑의 이데아'를 강조했다. 박부길의 어긋난 사랑의 출처는 부모의 부재다. 그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느끼지도, 배우지도 못했다. 그에게 혈연은 벗어나고 싶은 악몽이자 고향일 뿐이다. 그렇다고 부모의 부재가 박부길의 어긋난 사랑을 변호할 순 없다. 그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배우지 못한 점은 분명 안타깝고, 불쌍히 여겨 마땅하지만 그에 대한 측은함에 중점을 두어선 안 된다. 박부길의 사랑은 미숙함으로 인한 선처의 범위를 벗어났다.

 더 나아가서, 우린 박부길의 사랑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때론 옳은 것보다 틀린 것을 알고 행하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박부길의 틀린 사랑의 좋은 예가 된다. '다른'이 아닌 '틀린' 사랑 말이다. 사랑은 포용력이 크지만 폭력과 재단을 품어주진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폭력과 재단을 정당화할 순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과 재단을 허용해선 안 된다. 잘못된 사랑의 남용은 관계를 파멸로 이끌고 대상에게 수습 못할 상처를 새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p.258


 부모의 부재로 인해 사랑하는 기술을 익히지 못한 박부길은 사랑을 흉기로 둔갑시킨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어야 할 사랑이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니, 참으로 모순된다.




그녀는 완전해야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해야 했다. 그런 관념을 통해 나는 만족을 얻었다. 그렇게밖에 사랑하지 못한, 그것이 나의 불행이었고, 나의 사랑의 예정된 비극이었다. p.261


 세상엔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사랑 역시 그렇다.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굉장히 보수적인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사랑을 포함하여 어떤 것이든, 처음부터 잘하기란 어렵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며, 부재에 슬퍼하고 존재에 감사하면서 배워간다. 박부길도 그렇다. 사랑해보지 않았기에 박부길은 몰랐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다. 박부길이 사랑이라 착각한 건 그녀가 아니었다. 그가 만들어낸 허상의 그녀였다. 박부길의 사랑이란 것은 그저 프레임일뿐 수박 겉햝기식의 사랑도 못된다. 박부길이 자신의 선으로 여긴 표적에 꽂히기란, 애초에 잘못된 방향이었다. 그의 화살촉은 그녀를 겨냥하지 않았으며 시위는 그녀를 향해 당겨지지 않았다. 그녀와 이별 후, 박부길은 자신이 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지만, 이미 어둠 속으로 돌아간 뒤였다. 결국 그는 끝까지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하지 못한다. 골방 속 어둠과 동거하며 글로 그녀의 신화를 쓸 뿐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4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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