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얼룩 4화 가스라이팅인 줄도 모르고

by 은수달


"넌 도대체 언제 붙을래?"


열 번째 시험에서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엔 엄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시험은 나의 의지로 붙는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다. 엄마에게 시험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남다른 의지만 있다면 당연히 붙어야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이번엔 꼭 붙고 싶었는데... 아니... 붙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1938)이라는 연극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때는 엄마가 내게 하는 말이나 행동이 '가스 라이팅'인 줄 몰랐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일부러 괴롭히고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것이 현실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발바닥 아래 겹겹이 쌓여 있는 먼지들처럼.


"어디니? 이 시간에 밖에서 뭐해?"


엄마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일종의 완벽주의 혹은 강박증이다. 특히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연히(?) 감시와 지배의 대상이다. 내게 허락된 귀가시간은 자정 무렵. 하지만 자정이 되기도 전에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난 매번 긴장하며 받는다.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인 아버지 장례식장에 왔어요."

"언제 올 거니?"

"글쎄요."

"너무 늦지 마라."


공식적으로 외출이나 외박을 허락받기 위해선 그럴 듯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 중 가장 잘 먹히는 것은 지인의 경조사이다. 왜 남자들이 결혼하면 외박하기 위해 경조사 핑계를 대는지 알 것 같다. 너무 자주 써먹으면 들통날 가능성이 크므로, 아주 가끔씩만 이용해야 한다. 아직 돌아가시지 않은, 지인의 아버지한텐 살짝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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